아직 개치지 않은 홑이불 너머에 놓인 빨간 색상의 전화기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벨소리가 좁은 방을 울린다. 채 마음을 가다듬지 못한 청산댁은 방으로 들어서면서 불현듯 붉은 기운이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꿈속에서 신었던 구두의 상실감과 함께 눈에 선하게 남아 있는 여적(餘滴)과도 같이 눈꺼풀 아래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전화가 왔으면 수화기를 들고 받으면 되는 걸 몇 번을 알려줘도 악악 소리만 질러대요! 사지육신 멀쩡한 양반이 밥타령만 할 줄 알지 뭐 하나 하는 게 있어야지.\"
가슴속에 차 있는 앙금이 일시에 흩어지면서 입으로 토해지는 소리, 고운 소리가 나올 리 없다.
\"전화 받으라니까 어만 뚱딴지 같은 소리여?!\"
시어머니는 아직 닫히지 않은 문 쪽으로 돌아앉으면서 밖에서 몰려드는 찬바람에 목소리를 싣는다.
\"내 참 한 마디도 수그러들 때가 없으니.......\"
청산댁은 수화기를 귀에 대면서 중얼거린다.
\"아, 저 여보세요?\"
그녀는 돌아앉은 시어머니의 등짝을 바라보며 말을 서두른다. 입김만 불어도 고꾸라질 듯한 시어머니다. 그렇지만 마주 대할 때마다 성성하게 살아 있는 입심과 결코 무너지지 않는 성정(性情)에 결국 마음의 깃대를 꺽어야만 한다. 어쩌면 그 힘은 자신의 남편이자 안씨 집안의 장손(長孫)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장손을 길러 온 어머니의 힘일 것이다. 그 힘이 자신을 알게 모르게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장손의 아내로서 마땅히 두 딸과 더불어 한 가정을 화목하게 꾸려가야 하는 처지를 바로 알라는 엄한 명령을 알게 모르게 내리고 있는 시어머니다. 때때로 말을 거스르고 뜻을 거스를 수는 있어도 저 유약한 몸을 쓰러뜨리고 넘을 수는 없다. 바로 시어머니의 등뼈와 머리와 온몸에 남편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뭐라구요? 병원?!\"
청산댁은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옮겨 귀에 바싹 붙인다. 어느 새 그녀의 귀밑이 붉다. 수화기에서 전해지는 피 빛이 그녀의 볼 위에 얹히면서 얼굴마저 검붉어진다. 이와 함께 광대뼈 아래 두 볼이 씰룩거린다.
\"네 그런데요? 맞아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맞춰 대답을 하는 청산댁의 말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한다. 두 눈이 점차 커지면서 풍선처럼 부푼다.
\"교통사고요?!\"
마침내 곧추 세웠던 그녀의 목뼈가 바스라지면서 더없이 무거워진 머리가 뚝 떨궈진다.
\"아, 저 어느 병원이라구요? 네? 영등포 성심병원?\"
청산댁은 이 말과 함께 순간적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몸은 돌아앉아 있지만 동굴처럼 열려 있는 시어머니의 귓 속으로 자신의 말이 새어들어 갈까봐, 아니 어쩌면 이미 시어머니의 청신경을 요란하게 흔들었을 교통사고 얘기와 이후 거칠어진 자신의 숨소리를 능히 감지하고도 남았을 당신의 허리가 이쪽으로 휘어들기 전에 입술을 깨물어 닫아야만 한다. 시어머니를 지탱해주는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정확히 알게된다면 모녀가 동시에 몸져눕는 사태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게 된다면 한 몸으로 누구를 돌봐야 하겠는가. 짓눌린 입술이 떨리면서 손바닥마저 웅웅 울린다.
\"상태가?\"
어느 새 마른 입술에서 새어나는 소리가 갈갈이 갈라진다. 외로 돌아앉아 하는 말이라 검고 어두운 빛깔, 비틀리고 바람 빠진 음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