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수건이었다.
그래, 원래 수건이 내 것도 네 것 같고, 네 것도 내 것 같고 하니까
빨래를 걷다가 자기도 모르게 딸려갔겠지.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샴푸였다.
자취생 신분으로는 나름 사치품 항목에 분류해 놓고 살 때마다
아까워서 속이 쓰리는 그런 품목이었다.
그것이, 두번 쓰고 사라졌다.
허름한 목욕바구니에서 그것만 쏙 빠져나갔다. 제 자리 아니였다는 듯이.
정말 너무 너무 분했다. 당장 아침에 쓸 샴푸가 없어서 그 상황때문에 화가 더 났다.
뭐,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너무 방심하고 산 탓이려니 했다.
그런데, 입던 청바지까지 걷어가는 건 너무했다.
어제 새벽에 그 사실을 알고 화가나기 보다는 너무 황당했다.
정말? 정말? 정말? 하고 혼잣말을 몇 번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설 기념으로 그 바지와 어울릴 신발을 결제한 후였다. 너무 허탈했다.
바지를..살 껄 그랬다.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분노의 경고문을 써 내려갔다.
이 곳에 도둑이 함께 거주 중이니 빨래를 널 때 각별히 주의 바란다.
나는 수건과 샴푸, 그리고 지금 막 바지를 잃어버렸다. 뭐 그런 내용이다.
방마다 돌며 수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잡지도 못할 도둑에게
잡히면 죽는다는 경고를 하는 것은 비웃음 살 일 인것 같아 가까스로 생략했다.
그렇다고 아무말 안하기는 억울해서
"훔쳐가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죄책감도 안느낄 도둑 생각하니 화가난다"
한마디 썼다. 몹시 소심해보였지만 그렇게라도 하니까 맘이 좀 나았다.
겨우 잠들어서 아침에 나가보니, 내 경고문 아래 리플 쪽지가 붙어있다.
밤에 빨래를 걷어 실수로 딸려왔다며 돌려놓겠다고..
멍-
나는 바지가 돌아온 게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빨래와 섞일 수 없는 위치에 있던 내 빨래인데 그 말을 믿을지, 아니 그보다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제 나는 편한 맘으로 빨래를 널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이라는 가능성을 실감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 전과 후는 나는 똑같은 위험(?) 가운데 살고 있을텐데도 말이다.
매사 조심하게 되는 것은 나를 안전하게 만들지만 나를 번거롭게 만든다.
주변을 의심해야 하고, 벌어지지 않은 가능성들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벌써, 샴푸 사건 후로 목욕바구니 물을 뚝뚝 흘리며 방까지 가지고 들어오고 있는데,
이제 손바닥 만한 방에 빨랫줄까지 걸게 생겼다.
휴...
한숨이 난다.
'믿음'이 얼마나 인생을 간편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마음' 같은 것에 대해 믿음이 깨져버리는 경우가 제일 골치아프다.
진짜일까, 아닐까를 확인 할 길이 없다.
말이나 행동의 도움으로 간신히 추측해 볼 수 있다지만,
가끔 그것들은 마음과 다르게 흘러나오기도 하니까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알아낼 길 없는 것에 의심을 품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참 해결책이 없다.
그래서 하다하다 안될 때 내 멋대로 정답을 내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거나
미쳐버리거나, 없었던 일로 친다.
나는.. 음.. 밝힐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하니 골치아픈 경우인 것 같고,
미쳐버릴 만한 사건은 아니고, 없던 일로 치기에는 존재감 있는 사건이다.
바지를 실수로 걷어갔다는 사람을 내리 의심하기도 찝찝하다.
그냥, 샴푸도둑이 있는 것은 확실하니, 빨래 도둑으로 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쨌든 "도둑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빨랫줄을 널려면 못을 박아야 하는데...못을 박을 수 있나?
휴..모르겠다.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