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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탐험, 거창한 언설을 주저리 내놓을 생각은 없다.
시간탐험이라고 굳이 명명한 것은 순전히 겉멋에 불과하다.
말하고 싶은 것은 지나간 우리네 기억의 언저리에 남아 있는 것들을 쪼금은 되살리어 그려보자는 것이다. 새로운 것, 진기한 것, 그래서 항상 오늘에서 내일을 예기할 수 있는 것들에게 가치를 두는 우리들의 얄팍한 사고의 편향성을 조금은 반성도 해 보면서 말이다.
일단은 놀이문화에 관심이 간다.
어렸을 적, 땅따먹기라는 놀이가 있었다.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권장 사항으로 흙밭이 요구되었던, (흙밭이 여의치 않으면 꽤 평평한 시멘트 바닥도 괜찮다.) 그 놀이에서 우리네는 원시적 자본주의의 시초축적 내지, 자본의 재생산성과 확대일로로 치닫는 참여자의 논리를 선 경험했다. 똑같은 크기에서 출발한 집에서, 더 큰 땅을 얻는 첩경은 누가 먼저 땅을 그리기 시작하는가, 또 누가 얼마나 세밀한 기교가 있는가에서 판가름 났다. 그럼에도 땅따먹기는 비교적 건전한 자본주의였다. 누구든 기회가 닿게됨녀 제껏 이미 큰 땅을 가진 놈의 땅을 다시 따 먹을 수 있는 공정한 룰이 있었기 때문이다.(여기까지는 그저 땅따먹기의 사회학적 고찰이라 하자.)
말하고 싶은 요는 그런 땅따먹기를 하면서, 나누었던 우리들의 흙에 대한 정서와 땅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다. 거의 환경의 파괴를 야기하지 않는 기구들, 흙밭과 여기저기 구르는 작은 돌멩이들, 그리고 분필마저 사용치 않는 그냥 흙밭에 손이나 돌멩이로 선긋는 행위, 지극히 자연친화적인 놀이를 통해서, 우리네는 흙과 호흡했고, 땅을 시멘트 콘크리트가 아닌, 흙과 연관된 공간으로 인식했다. 또래 동무들의 코훌쩍이는 소리를 옆에서 듣고, 살이튼 손과 손톱에 끼인 떼를 마주하면서, 어울렸다. 흙과 동무와 땅은 그래서 종국에는 땅따먹기의 승자에게도 기분 좋은 하루의 저무름으로, 패자에게도 내일을 기약하는 앙큼한 다짐의 각오로 뒤끝 좋은 맺음을 선사했다.
그런데, 요즘 동네 꼬마들의 놀이는 좀 다르다.
거게가 장난감 총이며, 로봇이 손에 들려 있고, 조금 더하면, 게임기가 들려 있어 자랑하는 꼬마들이 심심찮다. 대개의 말다툼은 부모들의 개입으로 크게 번지기 마련이고, 끼리 동무들의 화해의 맺음이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 꼬마들이 흙밭에서 손 더럽히며 노는 것을 본 적도 거의 없다. 흙밭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쉽게도 이제 땅따먹기는 미래의 내 자식들에게 우리네 부모님이 말씀하시던 보릿고개, 쑥개떡, 쑥범벅과 다르지 않게 된 것 같다. 분명히 자식들에게 먼 아련함의 눈빛으로 '내 어렸을 때는'으로 시작되는 지나간 그래서 지금은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옛날 옛적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 같으다.
갑자기 땅따먹기가 하고 싶어진다.
어릴적 그 동무들 모두 모아 놓고, 그래 조금은 추레한 몰골로 코도 흘리고, 손톱에 꺼먼 흙 떼도 낀 채로, 제제거리면서, 그 놀이를 하고 싶다.
어른의 얘기는 모두 하지 않기로 하고, 그저 어릴적 그 얘기 그 수준으로 돌아가서 말이다.
이런 소망은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해도 굳이 아니라고 강별할 마음마저 않은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