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Dreamt. 3rd.
1. 그날 저녁 두어시간.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축제가 한창 진행 중이던 메
인 스트릿에서였다. 늦은 봄의 저녁이었는데 밤이 훈훈해
서 산책을 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같은 이유에서 인
지 그 저녁의 그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특히 가족끼리 다니는 듯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아이
들도 많았다.
해가 지고 벌써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행사의
열기는 지칠 줄을 몰랐다. 주변에는 노점 술집이 서너곳
눈에 띄었고, 그곳들은 모두 앉을 자리 없이 꽉 차 있었
다. 시큼한 맥주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좋은 날이었으므로 나 역시 맥주 캔을 하나 손에 쥐고
메인 스트릿을 걸으며 홀짝이고 있었다. 술을 그다지 즐
기지 않는 나는 술맛 보다는 축제, 사람들, 사람들이 점
점 거나해지고 유쾌해지는 공기. 그런 것에 더 취해 가
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연?"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을 보고, 나는 문득 그렇게 말했다.
그 이름을 듣자 상대는 흠칫 놀라는 듯 싶더니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여자였다. 긴 검은머리를 등 뒤로 흘려내리
고 파란색 셔츠에 블루진을 입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에게는 분명히 가
슴도 있었다. 신발도 뒷굽이 달린 샌달이었다.
"오랜만이야."
일 이초 정도가 서로를 응시하며 지나갔다. 마침내 그녀
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연?"
나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요 목소리였다.
******
내가 아는 이연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나는 그를 고
등학교 3학년때 알게되었다. 우리가 같은 반이었다거나
특별히 계기가 있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의 친구의 친구였으며, 그는 나의 친구의 친구였다. 우
리는 보충수업이 끝나고 몇번 늦은 하교를 했을 뿐이다.
그는 유난히 말이 없는 남자였다. 무언가를 물었을때 대
답하는 것 외에는 절대로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보지 못
했다. 아마도 내 친구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외톨이로 살
아가고 있었으리라. 나 자신도 그를 별로 맘에 들어하지
는 않았다.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요컨데 그는 상대에게 느낌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
시 떠올려 보면 꽤나 많은 하교를 함께 했음에도 내가 그
에 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의 이름 정도였으니깐. 적극
성의 완전한 부재.
고3 한해는 내게 있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기였다. 내
가 왜 인문고등학교를 갔는지도 알 수 없다. 나는 2학년
의 가을 어느 무렵에 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
기했다. 이유는 한없이 많았지만, 우선은 내 성적이 영
신통치 않았다는 것과 부모님의 불화 때문이었다. 당시
에 맞바람으로 시작된 부모님의 싸움은, 내가 3학년으로
올라갈때 즈음에는 완전한 결별의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
다. 두 형들이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
었기 때문에 막내아들이 진학을 포기한 것은 당시의 난
폭했던 상황 속에서 기묘하게 이해되어 기정사실이 되었
다. 덕분에 나는 어떤 압박도 받지 않고 매일 매일을 놀
아대었다. 담임도 나를 포기했다. 부모도 자신도 원하지
않는다면 쉬운 문제였다. 하긴 혹시 진학을 원했더라도
한심한 나의 시험 성적으로는 굼벵이가 구르는 것이 고
작이었겠지만.
어차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일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으
로. 나는 매일같이 원하는 책이나 실컷 읽었다. 국어도
작문도 별볼일 없었지만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소설도 좋고, 만화책도 좋고.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권
해지는대로 읽었다. 용돈은 큰형 작은형이 오히려 많다
싶을 정도로 주었다. 그들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이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즈음 어머니는 아예 미
국으로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으로 나는 매일 학교에 출석하고 있
었다. 급우들이 시간을 철저히 아껴가며 책과 싸우는 모
습을 보는것은 복잡한 일이었다.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
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없는 미래라는 것을 쫓고
있다고 여겨졌다. 나는 입시도 포기한 낙오자였으며, 그
들과의 거리는 몇만리나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그 대열에 합류할 마음은 없었으며, 그야말로 될대
로 되라는 심정으로 대부분의 수업은 책을 읽거나 잠으로
때웠다.
아무튼 학급 안에서 나처럼 수험을 포기한 사람이 몇명은
있게 마련인데. 나는 또 그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들은 공부와는 생전에 담을 쌓은 사람들로, 반은 날라
리들이고 반은 멍청이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
었지만 대개는 그랬다. 고 3이 계속될수록 나는 무료해
졌다. 나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
에 휩쓸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괜한 사람을 꼬
득여서 시간낭비를 시킬 생각은 없었다. 몇년 동안을 친
하게 지내왔던 사람들과 그런 식으로 소홀해졌다. 가끔씩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나중에는 어색해
져서 차라리 내가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레밍
스쥐들처럼 앞다투어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는 다른 길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가던가 낙오될 뿐
이다.
그런데 이연도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라고 친구가
말해주었다. '헤에- 그래?'라고 직접 묻자, 고개만 두어
번 주억거렸다.
나는 당시에 헤르만 헤세를 읽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큰
형에게 물려주고 큰형이 내게 물려준 문학 전집이 세로
활자로 되어 있어 불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농
담으로 세로 활자의 비과학성과 비논리성을 들어 그것을
죄악으로 싸잡고 있었던 것이다. 농담은 별로 재미있지
않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법썩을 떠는 나의 표정이나 말
투가 웃겼기 때문에 하교길은 즐거워졌다. 그러다가 친
구가 이연이 헤르만 헤세의 전집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
은 분명히 가로활자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리고는 이연에
게 빌려주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연은 선선히 승낙
했고, 친구가 이연도 나처럼 책을 많이 읽는데도 대학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구나-'하면서 나는 이연에
웃어보였다. 갑자기 그에게 친근감이 들었다. 대학 따위
는 가기 싫다는 이상한 사람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기
분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들- 친구와 이연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친구들이었
다. 친구의 경우는 키도 크고 운동이 만능에 공부도 잘
하고 사교성이 좋다는. 한마디로 누구나 좋아할만한 팔
방미인이었다. 게다가 어디서나 적극적인 리더 타입이
었으며 학급의 여러일을 맡아서 하곤 했다.
이연의 경우는 키도 작은편이고 도무지 눈에 띄는 점이
라고는 없는데다가 입도 열지 않는. 그는 극도로 수줍은
타입이었다. 반대는 서로를 잡아끈다지만, 어울리지 않
는 것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조금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은 조금 웃기
는 일이었다. 친구는 큰 걸음으로 이연의 왼쪽에서 성
큼성큼 걸어가고, 이연은 그 오른쪽에서 잰 걸음으로 빨
리 걸었다. 이연은 앞을 보고 걷지 않고 자기 왼쪽 발
조금 앞을 보면서 걸어갔다. 친구는 어깨도 목도 직선
으로 곧게 뻗어 교련 수업의 성공적 산실이라도 보고 있
는 듯했다. 무언가 코믹하게 심각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친구는 일류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의
장점들을 수식하다가 깜빡 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의 천품이었다. 친구의 할아버지는 국무총리를 역임했
으며 아버지는 어딘가의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누나가 하
나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재벌집 며느리라니, 어느 그룹에
데릴 사위 예약이 되어 있다니- 그런 얘기도 있었다. 물
론 친구는 그런 화제는 꺼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
가문이라던지 그런 것을 수치처럼 생각하는 듯 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물론 그런 것은 별 상관없었다.
******
"어떻게 지냈어?"
메인 스트릿의 축제는 계속되었다. 내 옆으로 한 아이가
한 손에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뛰어지나갔다.
"이리저리. 이것저것."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리저리 이것저것'은 떠돌아
다니며 막일로 생활하던 나를 훌륭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건강한 것 같애."
"헤에- 그래?"
그 말을 듣자 이연이 조금 웃었다. 그의 입술선이 예쁘
게 늘어났다. 나는 그가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 있다
는 것을 깨닳았다.
"넌 변한게 없구나. 후훗."
"헤에- 그런가?"
그가 다시 조금 웃었다. 아무튼 우리가 마지막으로 서로
를 본후로 적어도 5년은 지나있었다. 10대 말기에서 20대
를 지나는 5년이라면, 그 밀도는 어마어마한 것일 것임
에 분명하다. 아마도 60세에서 80세 까지의 20년에 필적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많은 일들을 겪어왔다.
그런데 봄날의 초저녁.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져 가로등
에 일제히 불이 들어온 때에.
나는 그의 완전한 변화에. 그는 나의 불변화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연이 조금 내게 가까이 왔다. 귀걸이도 목걸이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체형도 완전히 여자의 그것이었다. 나
는 더이상 내 자신의 오관을 무시하는것을 그만두었다.
이연은 여인이었다.
"맥주 한 잔 하러갈래?"
내가 들고 있던 라밧 블루캔을 흔들어보였다. 찰랑하는
느낌이 손에 느껴졌다. 맥주캔이 아직 시원한 것이 어
쩐지 이상했다. 실제로 내가 이연을 만나서 얘기한 시간
은 불과 오분도 안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한
두어시간 동안 노려보기 게임이라도 한 것 처럼 생각되
었다. 가벼운 두통도 있었다.
"좋아."
이연이 승낙했다. 우리는 내가 걸어내려온 언덕을 올라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오른편으로 잰 걸음을 하며 걸었다. 그녀의 시
선은 자신의 왼발 조금 앞을 주욱 주시하고 있었다. 그
걸음만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친구와 그녀가 나
란히 걷는 모습을 한참이나 관찰하고는 했기 때문에, 이
연이 걷는 방식을 거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서 오늘도, 메인 스트릿의 혼잡한 축제 가운데에서도 그
녀를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슬쩍 오른쪽을 돌아보면, 그녀의 옆얼굴이 보였다.
이연이 이렇게 예뻤던가. 속눈썹 밑으로 촉촉한 눈빛이
가로등 빛을 반사한다. 갸름한 볼과 속삭이는 듯한 입술.
그녀도 슬쩍슬쩍 내 쪽을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각도에서 그녀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아름다웠다.
케그 술집에 도착한 우리는, 안젤로에게 사정하다 싶이
해서 자리를 하나 얻었다. 그는 내가 여자를 데리고 술
집에 온 것이 마치 기적이기라도 한 양, 단골들에게 떠
들어대며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우리는 바 바로 옆의 일인용 테이블에 의자를 하나 가져
다 앉았다. 그녀는 내가 아는 중 가장 세련되고 매너있는
여자중에 하나였다.
"토론토는 어때?"
내가 물었다.
"좋아. 샌 프란시스코보다는 훨씬 춥지만."
그녀가 대답했다.
안젤로가 맥주와 소시지 몇개를 가져다 놓고 황급히 바
로 돌아갔다. 오늘은 장사가 굉장히 잘되어, 안젤로는
연신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즐겁게만 보
였다. 나는 맥주보다 소시지를 먼저 포크로 찍었다. 창자
살이 폭- 하고 터지는 소리.
"그 친구는?"
"여전해. 잘 있어."
"헤에- 그래?"
"응."
그녀는 맥주를 먼저 입에 댔다. 기세가 좋았으나 몇모금
째에 컵을 내려놓았다. 원래 입이 짧았다.
나는 소시지를 씹었다. 질겅질겅. 안젤로의 소시지는 늘
내게 조금 짰다.
이연은 휴식차 토론토에 왔다고 했다. 그녀에 따르면 친
구는 지금 한국과 미국을 자주 오가는 사업가가 되어 있
으며, 내가 기억하는 어떤 소문처럼 어느 재벌 그룹에
데릴 사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달리 어떻게 부르던지
말이다. 그녀 자신은 유태인이 많이 사는 한 지역에서
미용실을 하고 있으며, 어지간히 살아갈 만 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그 친구의 얘기로 넘어가서, 그가 얼마나
다른 기업인들로 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고 있는지. 얼마
나 손대는 일마다 성공하고 있는지. 그의 두살짜리 딸이
얼마나 똑똑하며 그가 얼마나 그의 딸을 자랑스러워 하
는지에 대해서 말했다.
이즈음에 그녀는 거나하게 취해서 거의 잠이 들려고 했
다. 내 맥주는 아직 절반이나 컵에 남아있었다. 소시지
만 한 접시를 통째로 먹어치웠다.
"헤에- 그래?"
나는 그것 밖에 대답할 말이 없었고. 따라서 그렇게 했
다.
이연이 울기 시작했다.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울상이
되려 하다가 눈물만 펑펑 쏟아졌다. 눈물은 화장을 지우
며 내려와 턱에 고일때는 색깔이 탁했다.
이연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인
가가 가슴에서 울컥이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꺼
내고 싶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와 볼을 적
셨다. 이연은 손짓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수그렸다. 끝
까지 그녀는 한 마디 말도 더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아름다워 보였고 측은하게 생각됐다.
한편으로, 턱끝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고개를 숙이
고 있는 그녀를 안고 싶었다. 성욕이 발가락 끝에서 부
터 맹렬하게 올라와 힘껏 고개를 들었다.
벌떡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추스리고는. 잠자코 흔들리
는 그녀를 일으켜 화장실로 데려갔다.
화장실에서 나는 그녀에게 입마추었다. 입술을 키스하고.
목덜미를 키스하고. 속눈썹과, 볼을 따라 내려가는 눈물
의 자국을 핥았다. 다시 입술에 키스하고, 그녀의 턱끝
에 고인 눈물을 맛보았다.
이연은 처음에는 바둥거렸으나, 곧 가만히 나의 입맞춤
을 받아들였다.
내가 이연이 내 자리에서 그 친구의 모습을 갈구하고 있
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
대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녀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다시 그녀를 키스했
다. 나도 울음이 났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울
고 있었다. 밤도 축제도 깊어가고 있었다.
2. 톨스토이에게 말하지 않은 다음날 아침의 두어시간.
톨스토이가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그는 그 뒤의 얘기를 듣고 싶어했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가르쳐 줄 수는 없었
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고는 다리를 꼬았다. 톨스토이는
무성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눈을 껌뻑였다. 아마도
내가 이야기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하여 뜸을 들이고 있
다고 생각하나 보다.
내가 이연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몰라도 괜챦은 이야
기였다. 괜히 그를 만난 자리에서 하지 않아도 되었을 언
급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 톨스토이는 굳이 알고 싶어했
다. 왜냐하면 무언가 잘못되고 죄악스러운 일일지도 모른
다고 여긴 이상, 그는 꼭 끝을 알고 심판을 내리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이봐요, 톨스토이. 당신의 책은 너무 두껍단 말예요.
<전쟁과 평화>라던가, <안나 카렐리나>도. 전쟁과 평화
는 15부에 에필로그만 두권이란 말예요."
나는 족히 두께가 10센티는 됨직한 그의 문고판을 들어
보였다. 그것은 펭귄 출판사의 <전쟁과 평화>였는데, 페
이지마다 좁쌀만한 글자들이 빽빽했다. 그렇게 해도 모
자라서 한권이 더 내 가방안에 들어있었다.
"핫핫핫핫."
그는 너털웃음을 짓고는 자신의 흑맥주를 들이마셨다. 안
젤로가 흑맥주를 가지고 있는 줄은 톨스토이가 주문하기
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 그런 것을 마
시는 사람이 어디있담.
그날 밤에 안젤로의 케그 술집에서 톨스토이와 얘기하던
주제는 '사랑'이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사뭇 할 말
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스물 다섯이고, 그는 일흔살.
사랑에 대해 주절거릴 거리가 많은 것이 당연하다. 늙은
이는 부정속에서 궁극적으로의 긍정. 젊은이는 긍정속에
서 내재된 강한 부정. 그런 것을 가지고 한참을 토론했
던 것이다.
언쟁을 전부 기억하는 것은 머리도 아프고 시간도 낭비
이다. 아무튼 우리는 좀처럼 동의하지 않았고, 때문에
한 말을 되풀이한 것이 수도 없었다. 종국에는 국가와 신
앙을 위한 사랑이 가장 지고한 것이라고 말하는 늙은이에
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한가지. 우리는 사랑의 필요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었다. 그것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톨스토이가 자신의 책, <전쟁과 평화>의 한부분을 인용
했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삶이다. 내가 알
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함으로 인해 알 수 있는 것
들이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엮어져 있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은 내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
다."
"브라보. 브라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이는 그로서 모처럼 시적흥분
과 흑맥주에 취해 버렸다. 벌거진 얼굴로 일어나서, 안젤
로의 피아노로 가더니 꽤나 능숙한 솜씨로 연주를 시작했
다. 쇼팽의 무언가라고 생각하는데, 나의 짧은 안목으로
는 기억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보름달 밤이었다.
나는 외로웠다.
******
그날 나는 새벽이 올때까지 이연과 함께 있었다. 스스로
도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무려 여섯번이나 사정했다.
내 침대는 눈물과 땀 등으로 인하여 완전히 젖어버렸었
다.
나는 이연이 간절히 애원하던 단 한가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날 밤,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떠나보내
지 않았다. 여명이 지나고 이미 세계가 밝아졌을 때까지.
그녀는 거의 탈진했었지만, 나는 역시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울었고, 나중에는 슬퍼서 우는 것인지도 잘
모르게 되었다. 단지 절대로 놓지 않았다. 절대로 혼자
버려두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크게 울었다.
아침에 내가 일어나서 요리를 했다. 저녁부터 계속 그녀
와 있었으므로 상당히 배가 고팠다. 복부가 쑥 꺼진것 같
은 느낌이었다.
냉장고는 비어있다 싶이 했다. 계란 한줄과 토마토 두개.
맥주 캔이 반다스. 모짜렐라 치즈에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었다. 꺼내어 표면을 벗기고 씻어내니 손바닥 만큼 밖
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로 나는 오믈렛을 만들기로
했다.
달걀을 다섯개 깨어서 그릇에 풀고. 토마토를 잘게 썰은
것과 치즈 썰은 것을 넣었을때 이연이 나왔다. 그녀의 얼
굴은 슬며시 붓고 팔다리에 멍자국이 많았다. 전날 만
났을때 입고 있던 파란색 티셔츠만 걸치고 있었다.
프라이팬을 달구고 재료를 부었다. 계란 익는 좋은 냄새
가 부엌에 감돌았다. 양파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
각을 했다. 나는 짭짤하지 않으면 단 오믈렛을 선호하는
편이였다.
이연은 냉장고를 한 번 열어보더니 기가 막혔는지 식탁
의자에 가서 앉았다. 한 이주일동안 장을 보러갈 틈이 없
어서 음식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 부엌은 깨끝했다. 장식
따위도 하나 없었다. 싱크대 옆에 달력이 하나 걸려있을
뿐이었다. 그림은 엘비스가 세명 나란히 서있는 것이었
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젊은 엘비스. 가운데에는 하얗고
반짝거리는 장식이 많이 달린 옷을 입은 구렛나룻의 엘
비스였다.
오믈렛은 완벽했다. 나는 반달 모양의 그것을 반으로 잘
라서 두개의 접시에 나눠담았다. 이연은 그것을 받아들더
니 고맙다는 말을 했다. 밤새 듣고 있었는데도 그녀의 목
소리가 생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고마워."
"...으응."
아침식사를 함께했다. 오믈렛은 상당히 맛이 있었다. 햄
이 조금 있었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생각했지만, 대체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연도 배가 고팠는지 포크가 재빨리 움직였다. 고개를
수그리고 정말 먹는데 몰두하는 것 처럼 보였다. 참 열
심히 먹는다, 하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고생하고 있었다. 내게 시달린 하룻밤 뿐만 아니
라, 아마도 그녀의 인생 전체가 크게 요동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의 팔은 너무 삐쩍 말랐고, 푸른 핏줄들이
길고 무성하게 들여보였다. 너무나, 너무나 피곤하게 살
아온 것 처럼 보였다.
그렇게 이연은 내가 조금 많았는가 생각했던 접시를 깨끗
이 비워내었다. 나는 오히려 그녀를 관찰하느라 반도 채
먹지 못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내가 황급
하게 포크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연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왜 웃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왜 웃어?"
******
...식사를 마치고 베란다에 나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
지 조금 쌀쌀했다. 그녀는 셔츠만 입고 있어서 더 추워
보였다.
"담배 있어?"
이연이 물었다. 나는 잠자코 바지 주머니에서 던힐을 하
나 빼어주고, 나도 한 개피 물었다. 불을 붙여주니까
이연은 한모금 깊숙히 들이키더니, 갑자기 콜록콜록 기
침을 해대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너무 독해. 너무 독해."
그녀는 잔기침을 하면서도 다시 한모금 들이 마셨다. 바
람이 조금씩 불면서 담배 연기를 흩어지게 했다. 멀리
동쪽에서는 해가 꽤나 올라 있었다. 나는 그날이 토요일
이라는 생각을 했고, 시장을 보러가리라고 결심했다. 양
파와 상추를 조금 사두고, 빵과 마요네즈도 가져다 두자.
마요네즈를 기억하게 된 것은 뭉실뭉실한 구름이 떠다
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 화창한 날씨였다.
조금 멍하니 있자니, 이번에는 이연이 나를 보고 있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그녀는 확실히 내가 알던 그와 닮았
다. 봄날 아침에 정말 무참하게 아름다웠다. 사람을 두고
꽃같다고 생각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봐?"
이연이 물었다. 나의 생각은 마요네즈를 담뿍 바른 샌드
위치에서 그녀에게로 쏠렸다.
"뭘?"
"여러가지."
"어떻게?"
"어떻게라니?"
나도 담배를 빨았다. 그녀의 의도가 잘 짐작이 가지 않았
다. 내가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누구를 위하여 알
아야 한단 말인가.
이연이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신경질적이라고
해도 히스테릭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언제나처럼 얌전하
지 않고 조금 삐진듯이 거칠다는 뜻이다.
사실은. 사실은 말이다. 나와 하룻밤을 미친듯이 보냈으
며 내가 한 오믈렛을 먹고 나의 발코니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으로. 그것으로 좋았다.
이연이 내가 알기로는 남자였으며. 그녀가 내 친구였던
사람의 정부 비슷한 처지로. 샌프란시스코에 사는데 왜
토론토, 그것도 그 위성도시에 와 있는지는 전혀 문제라
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젯밤은 나의 경우에 측은심이었고, 그녀의 경우는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에서 시작되었다고 치자. 이연은 내
고교시절의 친구를 죽도록 사랑하고 있으며, 아마 무슨
일이 있던지 뭐가 되던지 그를 끝까지 사랑할 거라고 치
자. 그래서 지난 밤이 고작 외도에 불과하고, 사실은 어
떤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야 한다고 치자.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인가?
******
나는 이연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를 다시 안고
싶었다.
톨스토이는 피아노를 계속 연주하고 있었다. 처음에 쇼
팽으로 시작해서, 베토벤의 소나타를 두어곡 연주하고는,
생소한 러시아의 민요를 한참 노래하다가, "사랑. 사랑.
사랑!"이라고 외치고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는 남자다
운 낮고 우렁찬 성량을 가지고 있었다.
스물 다섯살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랑은 아무래도 좋다. 남의 것이어도 좋다. 틀려도 좋
다. 뭐가 어째도 좋다.
이연이 떠났고, 그녀가 가기전에 우리는 네번이나 더 감
싸안고 뒹굴었다.
내가 대용품이라도 좋았다.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3. 섹스와 기억.
미처 잊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에는 추적추적 비
가 내리고 있었다. 참 소리없이 내리는 비였다. 눈을 감
아도 들리지 않았다. 날씨도 따스해서 마치 진한 안개가
쏟아지는 듣한 느낌이었다.
안젤로의 케그 술집을 나와서 메인 스트릿을 걸어갔다.
이연도 나도 훌쩍이고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
르겠지만, 술집을 나설 때에는 이미 축제는 끝나있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길가나 도보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 뿐이었다. 색종이 끈이나 풍선 조가리 따위
가 발에 차였다. 비 속에서 쓰레기들을 쓸거나 주워담는
사람들만 메인 스트릿에 있었다. 교회의 큰시계가 보이는
곳까지 가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열한시가 가까웠다.
안젤로의 술집을 제외한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은 것 같
았다. 가능하다면 커피숍에 들려 뭔가 따스한 것을 사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옆을 보니 이연의 긴 생머리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파란색 셔츠도 어느새 찍득하게 보일 정도로 젖
어있었다. 팔짱을 끼고 조금 떨고 있었는데, 많이 울었
기 때문에 추위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택시를 태워 그녀를 보내기가 싫어졌다. 뭐랄까. 그래서
는 안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그냥 싫었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만, 나는 심각하게 그녀에 대한 책임감을 느
끼고 있었다. 그녀의 울음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내 아파트로 가자."
이연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
었다. 우리는 비오는 메인 스트릿을 끝까지 걸어갔다.
사실 나는 그날 이연을 만나기 전까지 14개월 동안이나
여자와 자지 않았다. 그래서 뭔가 어색도 하고 불편도
하고 긴장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울면서 가슴이 깨끗
해진 탓인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거리는 뿌옇고 불분명했다. 차도에는 어느
새 물웅덩이가 얕게 고였다. 그래서 붉은 가로등빛이 여
기저기서 빛나고 있었다. 걷고 있는 얼굴에 차분히 작은
물방울들이 와닿았다. 이연이 내 오른편에서 걷고 있었
다.
아파트에 다다랐다. 고양이 한마리가 지붕위를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연이 그것을 눈으로 쫓았다. 나는 문을
열고 내가 세들어 살고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다시 하나의 문을 열고 나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산책을
나갔을때는 이렇게 늦게 돌아올줄은 몰랐으므로, 틀어놓
았던 라디오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비틀즈의 무언
가를 악기로만 편곡한 곡이었다. 이연이 내 뒤를 따라 들
어왔다.
아파트는 어두운 편이었으며, 내 방을 제외하고는 가구
도 하나 없었다. 티브이도 없고 옷장도 없고. 하지만 덕
분에 공간만은 넓게 쓰고 있었다. 라디오의 비틀즈는 은
은하게 아파트를 채워넣고 있었다. 음악이 마치 커텐을
눅눅하게 적시는 느낌이었다. 내 아파트 안에서도 안개
같은 비가 오고 있었다.
이연이 물었다.
"고양이 봤어?"
"응."
"비가 오는데 어딜 가고 있었을까."
"글쎄? ...글쎄."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쉬어있는 것 같았다. 눈에 아직 물
기가 어려 있다. 눈 주위가 빨개서 아플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젖은 셔츠를 벗겼다. 이연이 팔을
위로 올리고 거들었다. 내가 타올로 그녀의 머리를 빗어
내는 동안 이연은 바지도 벗었다. 그녀의 어깨 피부가 차
가왔다. 소름이 살짝 돋아있는 것 같았다.
"고양이라면 나도 알고 있어."
타올로 그녀의 어깨죽지와 턱. 목덜미를 닦아내면서 내
가 말했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있었다.
"타이거 캣이라는 종류였어. 흰색 털에 노을색 줄무니가
있던 녀석이야. 토실토실 잘 생겼었지. 걷는 것도 우아
하고, 멋진 고양이였다구."
"고양이를 길렀었어?"
"아니야. 그 고양이는 우연히 만났어. 어느날 일을 마치
고 관청 건물앞 벤치에 앉아있는데, 그 고양이가 다가오
기 시작했어."
"헛."
"신기하지. 난 고양이는 길러본 일이 없어. 그 뿐만이 아
니라 다른 애완동물도 한 번도 갖어 본 일이 없지. 솔직
히 동물들과는 사이가 않좋은 편이야. 왜, 걷다보면 처음
보는 개가 느닺없이 짖어댄다거나, 아무튼 동물이 나를
따르질 않아. 어렸을때 그네들을 너무 괴롭혀서 그런가
봐."
"업보라고 하는 거지."
"바로 그거야. 아무튼 동물은 질색이라구. 똥 오줌처리
도 사양하겠고. ...그런데 그 고양이만은 달랐어.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나에게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했어. 믿을
수 있어? 똑바로 내 눈을 보면서 말이야. 천천히. 멈추
지 않고. 근사하고 당당하게 걸어왔지."
"그래서?"
이때쯤에 나는 이연의 몸의 물기를 전부 닦아내었다. 그
래도 그녀가 추워보였으므로, 나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
나 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퐁- 하고 사라져 버렸지. 갑자기 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한눈을 팔았거든. 그런데 걸어오던 고양이가 없어져 버
렸다구. 참 한심도 하지."
"한눈을 팔지 않았어야 했어. 그런 고양이에게는."
"네 말이 맞아."
그녀의 가슴은 근사했다. 절대로 크지는 않고, 오히려
작다고 할 수 있는 크기인데도 매력이 넘쳤다. 특히 젖
꼭지가 그랬다.
찬찬히 그것을 어루만지며 내가 물었다.
"고양이를 길러본 적 있어?"
"...있어. 한국에서."
"헤에- 그래? 어떻게 생겼는데?"
"요-만한 크기의 순종이었어. 밤색- 털이 짧고. 옛날에
자취할때에."
그녀가 손으로 고양이를 그려보았다. 나는 밤색의 털이
짧은 녀석을 상상해 보았다. 내 머리속에서는 이상한 나
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사라지는 고양이처럼 웃고 있었다.
거기서 이연이 다시 울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그만두었다. 어떤 사람에게 고양이
는 많이 울 수 있는 화제였었다. 어쩌면 나도 울어야 하
는지 모르겠지만. 고양이는 공간도 시간도 기억도 모두
싸잡아서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내 방으로 이끌었다. 더블베드의 시트는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방은 작았지만, 있는 것이라곤 침대
와 책장밖에는 없었으므로 좁게는 생각되지 않았다. 열
고 닫게 되어있는 붙박이 벽장문을 닫자, 그 뒤의 창문
으로 비오는 것이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연이 가까이 와서 나의 셔츠를 벗겨냈다. 문득 오한이
느껴졌다. 그녀가 나의 가슴께를 쓰다듬었다. 나는 아직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그녀는 전라였다. 자그마하고 가
냘픈 존재가 내 앞에 서있었다. 비누냄새와 비슷하나 자
극적인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연은 울면서 나를 보았다. 눈이 안아달라고 말하고 있
었다. 눈물이 놓치 말아달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좁은
어깨가 너무 안스러웠다. 그것은 너무 약해 보였다. 그
래서 그들을 붙잡을 수 밖엔 없었다.
잠깐 소리지르고 싶었다. 이연이 사랑하는 남자가 미웠
다. 그가 미워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이연이 여기 있느냔 말이다. 어떻게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있느냔 말이다.
한편으로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오히려 운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거
의 완전히 다른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처럼 느껴졌다. 그것
이 또 굉장히 코믹해서, 나도 다시 눈에 눈물이 돌고 있
었다.
그것은 어떤 의식같은 것이었다. 더럽기는 커녕 오히려
정화를 위한 과정이었다. 그것은 부활을 위한 몸부림이
었다.
나는 머리를 안고 이마에 키스했다. 머리카락을 천천히
스다듬으며 차례로 눈썹, 눈, 코끝, 턱끝에 입을 맞추고
귓바퀴를 살짝 물었다. 이연의 턱이 좋았다. 턱끝 바로
뒤에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좋았다. 그곳을 거쳐 목
을 휩쓸고 어깨와 가슴께에 키스했다.
나는 그녀를 완전히 씻으려 한 것이다. 그녀에게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겨드랑이와 다시 어깨. 팔꿈치를
지나 팔과 손. 손가락 하나 하나에 키스했다. 뒷목에서
시작되어 등을 타고 내려가며 나의 입술이 방황했다. 숨
이 거칠어진 이연을 침대에 쓰러뜨리곤, 다리와 발, 발가
락 모두들. 이연의 육체의 모든 부분에 정성을 심어나갔
다.
내 속에서 거대한 사랑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
작했기 때문인지, 이연은 눈을 감고 흐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폭풍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슬픔
에 내 자신을 들이는 것이 좋은 지는 알 수 없었다. 단
지 절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하건데, 그녀가 나를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반했
다고 했다. 나는 이연의 모든 것을 감싸안고 있었다. 그
녀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도 그 모든 것에
포함되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럼으로서 느끼는
실망과 배연의 슬픔도, 이연의 슬픔을 나눠같는 행위처
럼 여겨졌다. 나로서는 그렇게 사랑하면서 행복했다.
그녀도 울고 나도 울고.
섹스는 공유였다. 영혼이 교차하였다. 나는 폭군처럼 이
연의 몸을 난폭하게 다루었지만, 결국은 노예이자 자식
으로 그녀의 품에서 쓰러졌다. 무언가가 나를 다시 되살
리고, 불살르고, 이연은 울면서 나에 의해 태워졌다. 재
가 되어버렸다.
******
적어도 육년전의 일이다. 헤르만 헤세의 전집을 빌리러
이연의 집으로 갔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이연이
방에서 나와 책을 건네주고 내 옆에 앉았다.
그 친구 없이 이연과 함께 있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이연은 당시에 남자였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말없
고 허약한 녀석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수레바퀴 밑에서. 유리알 유희. 따위의 제목이 적힌 전
집들을 하나씩 들춰보며, 나는 그에게 무언가 말을 걸
어보려 하고 있었다. 이연은 대답도 제대로 잘 못할 정
도로 숫기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날 저녁에 만난
이연은 엄청나게 말이 많아진 셈이다.
그런 이연이 유일하게 밝아지는 화제가 있었는데, 그것
은 그 친구에 대한 얘기가 나올때였다. 친구와 나의 모
험담이라도 할라치면 이연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친구는 그에게 거의 우상이나 다름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
하고 내가 묻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화가 났다.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곰곰히
기억을 되새겨 본다면, 나는 이연이 그토록 완벽하게 독
점되었다는 것에 화가 났던 것 같다. 시기심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그 후로 나는 그 친구와 이연- 둘 다에게서 멀어졌다. 뻔
질대던 고등학교 3학년의 후반은, 그 무렵 만났던 한 여
자에게 몰두하다가 끝이 났다.
딱 한 번, 이연을 만나서 이야기한 일은 있었다. 졸업하
고 3개월쯤 된 무렵에 큰형의 집에 다녀오던 중이였다.
그때도 저녁때였는데, 마주오던 이연과 우연히 마주쳐
같이 걷게 되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이미 지평선에 거의 맞다아 있었다.
하필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걸었기 때문에, 눈이 부
셔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아니면 단지 그날 기분이 몹
시 얹잖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졸업후에 큰형의
소개로 공장일을 시작했는데, 여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나 싫은 사람이 많아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이연은 내 조금 뒤에서 걸어가며 내 불평을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내가 빌렸던 전집을 떠올렸다.
"헤세 전집. 그거 어떻게 돌려주지?"
"...그거, 가져도 돼."
"뭐? 정말?"
내가 돌아보니까, 이연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저녁놀
이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읽지도 않고. 그리고 주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돼?"
"응."
사실은 헤세가 그렇게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나는
독일문학보다는 프랑스문학을 선호했다. 무엇보다 당시
에는 영문학을 읽었는데- 주로 미국문학을 고르는 형편
이었다. 헤밍웨이나 오. 헨리. 에드가 알런 포 등을 읽
고 또 읽었다.스캇 핏제랄드나 스타인벡등이 좋았다. 결
론은 헤세가 뒷전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준다니까는
받기로 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걷고 있었고, 다시 내가 뒤돌아 보았다. 나는 이
명이 몇달사이에 얼마나 말랐는지를 깨닳았다. 병이라도
걸린건지 의심이 갔다.
"사실은 네가 나한테 잘해준 유일한 사람이거든. 그 사
람을 제외하고."
"헤에- 그래?"
그것은 정말이었다. 이연은 아마도 그 친구 외에는 나
밖에 말해본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갑
자기 이연이 죽을 병에라도 걸린 것 아닌가- 하고 겁이
덜컥 났다. 이연이 계속 말했다.
"게다가 난 헤세는 별로거든."
"흐음. 그렇군."
이연은 그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간다고 했다. 들떠 있
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선뜻 전집을 주겠다고 하는 것
인지도 몰랐다. 이연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이라는 것은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자식. 언제 우리 술이나 함께 마시자. 그 친구 없이
우리 둘이서. 넌 다른 사람도 사귀어 봐야돼. 그땐 내
가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지."
"...괜챦은데."
"내가 사는 거니까 걱정 말아용. 너도 맨날 녀석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냐. 서로 지겹지도 않냐?"
"헤헷."
"뭐가 '헤헷'이냐..."
그리고는 헤어졌다. 다시 만난 것은 먼 훗날, 메인 스트릿
의 축제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