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피곤하다면서 이제 올라가 자야겠다고 했어. 하루밤이 이렇게 짧은지 처음으로 알았어.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는데, 막상 그동한 한 이야기들이 다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 같아 불안해졌어. 이제 나는 멀리 가야 하는데, 너와 멀리 떨어져야 하는데 내게 남겨진 것은 과연 무엇인가? 너의 실루엣! 그래, 나는 너의 실루엣을 내 뇌 깊숙한 곳에 고이고이 담았어. 잊지 않기로 했어. 평생 너를 다시 만날 일이 없게 되더라도,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나중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남루한 무언가 처럼 느껴지는 나이가 되더라도 너의 '실루엣'만은 평생 남겨두기로 했어. 난 그렇게 널 '사랑했던' 누군가가 되버리고 마는가.
그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올 이틀간은 널 볼 수 없었어. 이모부랑 몇곳을 다니고, 식사 약속에 나가고, 한국 사람이 몇 없는 곳이라 난 항상 너의 흔적을 찾았지만 부질 없을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새벽 4시에 있었어. 그리고 그 전날 저녁에 네가 전화를 해주기로 약속을 해서. 난 기다렸어. 저녁을 먹고, 밤이 되고, 12시가 넘는데도 전화는 오지 않았어. 그래서 웃었어. 사람의 감정이란 이렇게 허망한 것인가 싶었어. 이렇게 널 그리워하고,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선을 통해서라도 네 숨소리 한번이 아쉬워서 이러고 있는 나의 모습에 화가 나려고도 했어. 그리 어려운 약속도 아니었는데, 새벽 1시, 2시 그리고 3시가 되어서 나갈 준비를 하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때는 이미 서울에 비행기가 내리고 있었어. 너라는 사람은, 너의 웃음은, 너와의 기억은, 네 옆모습은 모두, 모두 꿈처럼 잊혀지고 마는가.
대학에 들어갔어. 캠퍼스라는 장소의 아름다움. 들떠있었던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딱 그렇게 신입생처럼 지내면서 너라는 사람을 잊어가고 있었어. 네가 적어준 메일 주소가 있었지만, 차마 뭐라고 쓸 엄두는 나지 않아서 그냥 서랍 깊숙히 넣어두고만 있었어. 널 봉인해버리려고 했던 것일까?
그러다가 네게, 내가 메일을 썼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질 않아. 다만, 그렇게 무던히도 잊으려 했던 너라는 사람을 다시 표면으로 꺼냈어.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나의 메일은 또 역시 '안녕'이라는 어색한 인사로 시작되었어.
아마 이래서 그렇게 널 봉인하려고 했던 것일꺼야.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네 답장만 기다리고 있을 내가 싫었던거야. 새로 고침, 새로 고침, 새로 고침, 새로 고침. 그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우스만 까딱이고 있었어. 이 '새로 고침' 사이에 미국에서 부터 통신망을 따라서 네게 메일이 날라올 것을 기대하면서, 시간이 날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새로 고침. 또, 새 로 고 침.
문득 '새로 고침'이라는 단어가 먼 외계을 말처럼 느껴질때 즈음에 문득 낯익은 이름이 '발신자' 란에 있었어. 메일 한통이, 그저 2K 짜리의 작은 파일이었지만, 0과 1로 이루어진 얼마 되지도 않은 조합, 그 작은 '조각'이 내 심장에 와서 박혔어. '봉인을 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