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조급해졌어. 난 이제 보름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너와 그 보름간 얼마나 함께 있을 수 있는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보였어. 이제 막 '안녕'이라는 인사를 나눈 네게 보름간 내 곁에 있어달라고 할 순 없었어. 난 그냥 '안타까워 하는 일 밖에는'. 그런데, 네가 내게 물었어.
"미국에서 뭐해? 차 없으니까 갈데도 없고 심심하지?"
"어.. .. .. 근데.. 뭐.. .. .."
"나랑, 남동생 마침 이번주에 학교도 안가는데 너 우리 집에나 놀러 와라."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야기 하고 싶어. 정말로 그 느낌 그대로 여기에 적어놓고 싶어.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지? 믿을 수 있겠어? 네가 웃으면서 내게 그렇게 말했어. 네가 내게 놀라오라고 했어. 맙 소 사.
그렇게 보름간 난 너와, 네 남동생과 함께 많이도 놀러 다녔어. 네가 많은 친구들을 소개시켜줬어. 같이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아이스 링크에 놀러 가고, 교회에 갔어(교회에는 태어나서 처음이었어). 한순간도 잊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넌 그렇게 내게 웃어주고, 웃어주고, 웃어주었어. 네가 웃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꺼란 걸 알았어. 네가 웃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보름은 금새 지나가고 있었어. 한국에는 고등학교 졸업식때문에 돌아가야 했는데, 후회스러웠어. 한국에서 대학생활이니, 서울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니, 고등학교 3년 내내 날 들뜨게 했던 모든 기대들은 그저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나는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날, 내가 널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을 우리 사촌 누나가 눈치를 챘는지 널 놀러오라고 했어. 그래서 네가 내가 지내던 이모네 댁에 놀러왔어. 식사를 하고, 한국 프로 비디오를 보고, 어른들은 주무시러 가시고, 누나도 얼마 안있어 잔다고 2층에 올라가시고 너와 나만 남았어. 숨조차 쉴 수 없을 것만 같아. 난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했어. 네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 네가 날 어린애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떻게 해야 내가 '남자' 처럼 보일 수 있을까? 널 재미있게 해줘야 자러 올라간다고 하지 않을텐데.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지금 내 머리 이상하지 않나? 얼굴에 기름기가 너무 많지는 않나? 그러다가 나는 어리석게도 맥주를 한캔 마셔야 겠다고 했어. 모든것들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머리 속에 담아두려고 해도 부족할 순간에 난 어리석게도 태어나 처음으로 술을 마셨어. 그러면 네가 날 '어른'처럼 여기지 않을까 생각했어. 적당히 술기운이 오르니까 괜히 자신감이 생겼어. 네게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말을 하고, 문득문든 아직 고등학생인 너에 비해(한국에서 미국으로 전학을 오다 보니 넌 아직 고등학생이었어) 난 대학생이라고, 이유없는 긍지 비슷한 감정까지 생겼어. 너도 또래 친구가 없어서 그랬는지 많은 말들을 했어. 난 얼굴을 시뻘개져서, 네 이야기를 더 잘 들어주는 편이 좋았을텐데, 그게 더 좋았을텐데. 그런다가, 네가 무슨 고민을 이야기 했어. 아마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녀서 한국에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하는 걱정이었을꺼야. 그런데 내가 말했어. "괜찮아, 넌 예쁘잖아."
내가 할 수 있는 너에 대한 호감의 표현이란 그게 최선이었어. 내 마음을 들키면 (어짜피 내가 한국에 가면 볼 수 없는 너인데도) 네가 산산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난 고작 "괜찮아 넌 예쁘잖아."라고 했어. 내가 너의 외모만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어떻게 하지, 날 이상한 애로 여기지 않을까? 빨개진 내 얼굴이 우습겠지. 내가 하는 꼬락서니가 가소롭겠지. 젠장.
넌 그저 '무슨 소리야?'하고 웃어넘겼고, 내 생에 최초의 고백은 '무슨 소리야?'라는 핀잔으로 끝났어. 다행히 너와 더 이야기 할 수 있었어. 새벽 3시가 지나고, 4시가 지나고. 문득, 봤어. 네 실루엣. 네 옆모습. 할로겐 조명만이 켜진 거실에서, 네 이마와, 오똑한 코와, 도톰한 입술이 만들어낸 네 옆모습. 그 실루엣. 한국에 돌아와서도 오래동안 널 기억하게 해준 그 실루엣. 난 이제 정말로 널 사랑해. 네 옆모습을 사랑해. 결국에 내게 허락된 것은 너의 실루엣을 기억 할 수 있는 자격 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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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언가를 추억한다는 것도 괜찮은 일이군요..
벌써 5년전의 일인데..
아직도 할말이 많은데..
오늘은 일단 자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