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시 모음> 한상남의 '봄비' 외 + 봄비 소리 없이 겨울의 휘장을 그어 내리는 무수한 면도날 허공에서 올올이 풀리는 비단실은 누구의 맑은 핏줄로 스며드는 것일까? 나도 오늘은 조용히 흘러 순결한 이의 뜨락에 온전히 수혈되고 싶다 (한상남·시인, 1953-) + 봄비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 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안도현·시인, 1961-) + 봄비 낮게 낮게 고개를 낮추고 허리를 낮추고 생각을 낮추어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메마르고 푸석거리는 마음밭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은혜 (이섬·여류 시인, 대전 거주) + 봄비 하늘나라 고관대작의 밀실서랍에서 슬쩍해온 수입산 발모촉진제를 사람 몰래 뿌리는 봄 경칩 녘 대머리 오름 화색 벌써 푸르다. (고정국·시조 시인, 1947-) + 봄비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오세영·시인, 1942-) + 봄비 겨우내 햇볕 한 모금 들지 않던 뒤꼍 추녀 밑 마늘 광 위으로 봄비는 나리어 얼굴에 까만 먼지 쓰고 눈감고 누워 세월 모르고 살아 온 저 잔설을 일깨운다 잔설은 투덜거리며 일어나 때묻은 이불 개켜 옆구리에 끼더니 슬쩍 어디론가 사라진다 잔설이 떠나고 없는 추녀 밑 깨진 기왓장 틈으로 종일 빗물이 스민다 (이동순·시인, 1950-) + 연금술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꽃 들어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합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겁니다 빗물을 방울방울 물들이는 꽃과 잎에서 나는 배울 테니까요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사라 티즈데일·미국 시인, 1884-1933) + 봄비 너를 능가할 연애 선수 아마 없지 싶다 경직된 여인의 몸을 안심시키듯 요란하게도 아니고 강하게도 아니고 낮은 목소리로 불러내는 맑은 환희 굳은 마음 푸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속속들이 놓치지 않는 달달한 애무로 얼어붙어 쌩한 고집마저 녹이는 솜씨 좀 보라지 네가 일으켜 세우는 저, 저 상큼한 연애세포들 너 다녀간 곳곳마다 새 생명 파릇하다 (정소진·시인) + 봄비 참혹하게 쓰러졌던 나뭇잎 위에 색색이 천을 놓아 하나씩 하나씩 궁핍의 겨울을 꿰매는 손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만유의 어깨 위에 내려 빈혈의 혈관을 채워 주고 서릿발 같던 하늘 비단 안개로 닦아 내어 천지에는 자근자근 땅 밟으며 일어서는 병후의 시력.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천년을 다시 살아나서 죽은 혼 불러내어 일으켜 세워 주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다시 보는 약손. (강계순·시인, 1937-) + 봄비 투신하여 내 몸을 꽂고 나면 어느 만큼 지나 그 자리, 구멍마다 제 이름 달고 투항하는 풀잎 그렇게 온갖 것들이 일어서고 난 후 드디어 그 눈짓 속에 파묻히는 나무 3월 지나며 어디선가 잦은 꿈들이 뒤척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꿈속에서 많은 이름들이 가방을 열고 나온다 (김영준·시인, 1938-) + 봄비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김용택·시인, 194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