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시 모음> 이상국의 '날짐승 들짐승의 사랑이 그러하듯 + 날짐승 들짐승의 사랑이 그러하듯 이 땅 꽃과 나무들의 사랑이 그러하듯 우리들 사랑 또한 무엇의 허락을 받는 게 아니고 그리운 눈빛과 부푼 젖가슴으로 우리들의 절반과 몸을 섞는 일이야 날짐승 들짐승의 사랑이 그러하듯 우리들의 짝짓기는 우리 땅 햇빛 아래 화염병처럼 타오르는 피와 따뜻한 자궁으로 깨끗한 새끼들을 퍼뜨리는 일이야 (이상국·시인, 1946-) + 어디서 큰 짐승이 울고 있다 철 믿고 손 내민 참나무 새순이 얼어 있다 작은 새 한 마리, 또 한 마리 참나무 가지 위에 둥지를 틀다 말고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죽지에 부리를 묻은 채…… 어디서 큰 짐승이 울고 있다 (감태준·시인, 1947-) + 짐승의 꿈 나는 어둠이야 이 고요함 속에 나는 온통 별이야, 눈물이야 하늘이여 팔을 내려 번쩍이는 북두칠성 굽은 팔을 내려 나를 안아가 주오 이 영혼이 별의 가지 끝에 이슬로 맺혔다가 날아가 밤의 나라, 고요히 불타는 나라 그 가슴에 묻히면 무궁에 눈뜰 거야, 우주에 피어나 해탈하여 날아다니며 노래할 거야 풀잎에 어둠으로 웅크려 밤하늘을 쳐다보며 꿈꾸는 나는 지금 죽음보다 황홀한 짐승 허공 가지에 커다란 달로 떠 그대 가슴에 안길까 눈시울 붉은 꽃으로 가서 그대 가슴에 묻힐까 고요한 밤하늘을 울리는 심금 나는 죽어서 별이야 별빛 가지에 피어난 눈물이야 (이성선·시인, 1941-2001) + 산 짐승을 위하여 가을날 숲속에서 도토리 주워가는 사람들이여 겨울날 산속을 헤매는 눈이 맑은 산 짐승들의 구슬픈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가 도토리묵에 가족들 밥상은 즐겁고 입맛 도는 일이지만 저 도토리나무도 당신 위해 여름내 고생한 것은 아니라네 어서 주운 도토리 한 알 떨어진 자리에 그냥 두고 산을 내려가시게나 배고픈 산짐승을 위하여 (심순덕·시인, 강원도 평창 출생) + 내 오늘 한 마리 짐승으로 모가지에 쇠목고리가 채워지고 역촌동 수의과 병원 쇠창살 안에 갇힌 후에 나는 비로소 한 마리 짐승 이 봄날 황사바람 흉흉하게 부는데 나는 짖지 못하는 한 마리 짐승 도적을 짖지 못하고 자유를 짖지 못하는 한 마리 짐승 사월이 가고 오월이 오는데 이 봄날 황사바람 흉흉하게 부는데 잇몸에서 돋는 칼날 같은 말 전신에서 돋는 흉기 어쩌지 못하나니 내 오늘 한 마리 짐승으로 피울음 감추나니 역촌동 수의과 병원 쇠창살 안에서 며칠 동안 또 며칠 동안 온몸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잡나니 (김종해·시인, 1941-) + 눈물과 짐승 온몸에 피 칠하고 너를 낳고 나서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는 눈먼 짐승이었다. 새끼가 울면 누가 보거나 말거나 젖을 꺼내 물리고 새끼가 아프면 혀로 온몸 핥아 주는 나는 한 마리 짐승에 불과했다. 제비 고슴도치 배추벌레도 모성애는 있다지. 그들 미물과 인간의 모성애가 다른 것은 때로 절제나 엄격으로도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거라 했지. 그러나 나는 얼마나 미물인가. 맹자 어머니를 비롯하여 수많은 큰 어머니들을 알건만 나는 제 새끼의 고뿔 하나. 뾰루지 하나 대신 앓아 주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 그저 지금도 비가 오나 해가 뜨나 가슴이 철렁해서 바래고 낡은 사진첩 꺼내 놓고 네 예쁜 고추. 환한 웃음 바라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겨워하는 것은. 그래, 나는 한낱 짐승이다. 눈물하고 짐승밖엔 가진 것이 없다. 아느냐, 이것이 어머니, 내가 가진 전 재산인 것을. (문정희·시인, 1947-) + 가장 사나운 짐승 내가 다섯 해나 살다가 온 하와이 호놀룰루 시의 동물원, 철책과 철망 속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짐승과 새들이 길러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구경거리의 마지막 코스 "가장 사나운 짐승"이라는 팻말이 붙은 한 우리 속에는 대문짝만한 큰 거울이 놓여 있어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찔끔 놀라게 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때마다 거울에다 얼굴도 마음도 비춰보면서 스스로가 사납고도 고약한 짐승이 되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구상·시인, 1919-2004) + 문득, 산 짐승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산에 오르면 문득, 신발이나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벌거벗은 채로 산 짐승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작은 짐승들조차 보이지 않는 산이 무서워 생명이 없는 산이 무서워 산이 아닌 산이 무서워 산에서 서둘러 내려오다가도 뒤를 돌아보면 산이 가엾어, 자꾸만 가엾어 나라도 산에 남아 한 마리 순한 산 짐승으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산 헐고, 산 뚫어 산 짐승은 떠나가고 사람의 길만 있는 산 숲에 향기로운 생명을 심기 전에는 사람의 마지막이 산에 누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문득, 산 짐승이 되고 싶어 산에 오르는 때가 있다. (김상현·시인, 1947-) + 작은 짐승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신석정·시인, 1907-1974) + 짐승들 이야기 그 모피공장엔 짐승들이 우글거렸네. 사람인 척하는 짐승 같은 사람과 짐승 취급을 당하며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들과 죽은 짐승들의 눈(眼)이 쌓인 모피창고가 있었네. 숨쉬기조차 힘들게 날아오르는 짐승의 털도 가난을 밀어내지 못하고 배고픈 짐승들은 배부른 짐승의 하룻밤 술값 정도에 금방 길들여졌네. 숱한 밤이 뜬눈으로 들들들, 미싱에 박혀죽고, 먼지 쌓인 바닥에서 죽은 짐승들의 물 먹인 껍데기는 고무줄처럼 팽팽히 당겨졌네. 끈질기게 살아남은 짐승들, 늘어난 가죽에 빗질을 하며 눈부신 빛을 달고 있었네. 죽어서 더 빛이 나는 껍데기에 밤새 날개를 달고 달았네. 그저 일밖에 모르는 짐승들, 수입산 백여우의 탐스러운 꼬리에 손 베이는 줄 몰랐네. 질긴 뱃가죽을 칼로 찢으며 제 가슴도 찢고 있었네 수없이 죽어간 짐승들의 슬픈 눈에 그 해 여름, 펄펄 눈이 내리고. (마경덕·시인, 195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