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시 모음> 이창건의 '산' 외 + 산 산은 높이만큼 뿌리도 깊다 세상을 겉으로 보기보다는 안으로 본다 그래서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나무들이 잎을 더디 피우거나 풀벌레들이 눈을 늦게 떠도 조바심하지 않는다 안개가 어둠처럼 몸을 때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산은 하늘이 내리시는 일로 세상이 어려움을 당하면 남보다 제일 먼저 걱정하고 세상이 즐거워하면 남보다 제일 늦게 즐거움을 맞는다. (이창건·시인, 1951-) + 山에서 큰다 나는 山에서 큰다 언제나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 대답 없는 대답 침묵의 말씀 고개 하나 까딱 않고 빙그레 웃는 山 커다란 가슴 가득한 바위 풀 향기 덤덤한 얼굴빛 침묵의 聖者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달래다 호통도 곧잘 치시는 오라버니 山 오늘도 끝없이 山에서 큰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모른다고 한다 산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고 한다 속잎 파릇파릇 돋아나는 날 모른다고 한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내가 이처럼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산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고 한다 (이기철·시인, 1943-) + 산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 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정희성·시인, 1945-) + 티벳에서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꿈꾼다 설산/ 갠지즈강의 발원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생의 끝 봉우리로 오른다 그러나 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五峰(오봉) 선사(禪師) 다섯 분이 엉금엉금 구름을 딛고 갑니다 은하수 저 너머 어느 별 마을에 무슨 잔치라도 벌어졌는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개 끄덕이며 활개 치며 도포자락 바람에 날리며 허공을 딛고 갑니다 (임보·시인, 1940-) * 오봉: 도봉산 북쪽에 자리한 다섯 봉우리. + 山, 山 산과 산이 서로 좋아라 끌어안고 내(川)를 흘려 체액을 나누는 기막힌 합방 속 새 새끼가 난다 (박완호·시인, 충북 진천 출생) + 산 산에 오르면 돈도 명예도 하잘 것 없다 돈보다 더 좋은 산 명예보다 더 높은 산 산에 오르면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모두 산이다 (강신용·시인, 충남 연기 출생) + 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도종환·시인, 1954-) + 천방산千房山 거대한 산 봉우리로부터 실오라기 같은 물줄기가 수없이 많은 골을 타고 내려온다 가만가만, 자세히 바라보면 봉우리로부터 뻗어 내린 물줄기는 하나 둘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두 눈 밑으로 흘러내리는 실오라기 같은 물줄기가 보일 듯 말듯 숲을 거느려 감추어가고 있다 아, 이 세상에 어머니로 태어나시면서 저토록 많은 물줄기를 거느려 오신 게다 부끄러움처럼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감추어 오고 계신 게다 지금 거대한 산이 울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온통 푸르고 푸른 여름 숲에 감추어진 골을 따라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린 새끼들의 세상을 굽어보고 계시다 (구재기·시인, 1950-) + 도봉산 굽이굽이 길다란 능선들의 저 육중한 몸뚱이 하늘 아래 퍼질러 누워 그저 햇살이나 쪼이고 바람과 노니는 듯 빈둥빈둥 게으름이나 피우는 듯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틈에 너의 온몸 연둣빛 생명으로 활활 불타고 있는가 정중동(靜中動)! 고요함 속 너의 찬란한 목숨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