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성찰 시 모음> 고은의 '작별' 외 + 작별 내 얼굴을 들이대며 무엇이 되고 싶어했다 지난 30년 동안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 거울이었다 항상 그 거울을 저쪽에 아주아주 던져버렸다 쨍그랑!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은·시인, 1933-) + 나는 너무 무겁다 소금쟁이 한 마리가 물 위를 걸어다닌다 소금쟁이 두 마리가 물 위를 뛰어다닌다 소금쟁이 여러 마리가 물 위에서 춤을 춘다 나는 하나의 늪도 건너지 못했다 (양선희·시인, 1960-) + 다시 절벽으로 내가 시시해졌다 부동산, 재테크, 조루증 상담 이런 광고들에 눈이 쏠린다 아찔한 계룡산 능선이나 북한산 바위 절벽 거기 매달려 있는 소나무들이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연을 믿다니 나는 분명히 타락했다 이렇게 쉽게 순결이 구겨지다니 절벽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공광규·시인, 1960-) + 나의 존재 바람이 집이 없듯이 구름이 거처가 없듯이 나는 바람에 밀려가는 집 없는 구름이옵니다 나뭇가지에 간혹 의지한다 해도 바람이 불면 작별을 해야 할 덧없는 구름이올시다 (조병화·시인, 1921-2003) + 나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찌꺼기인가? 아직 나 자신인가? 아니, 고쳐 물어보자 나는 나 자신의 찌꺼기인가? 나 자신인가? (황인숙·시인, 1958-) + 절필(絶筆) 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들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이근배·시인, 1940-) + 졸개 이제 누군가를 따라다니는 일도 시들해졌고 누군가를 끝없이 욕하는 일도 신물이 난지 오래, 제발 혼자가 되어야 할 일이다, 오로지 혼자가 되어 나무 아래 한 그루 나무로 외로워지고 하늘 아래 또 하나 하늘로 가득해지고 먼지 날리는 자갈길 위에 오로지 고달픈 노새가 되어 고달플 일이로다 부디 누군가의 졸개가 될 일이 아니고 자기의 졸개가 한번 되어볼 일이다 정이나 졸개가 되려면 바람의 졸개가 되고 똘만이가 되려면 구름의 똘만이가 되거라 나무 나무, 나무의 진짜 심복이나 되거라. (나태주·시인, 1945-) + 다시 나만 남았다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렀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돌무덤이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이생진·시인, 1929-) + 나의 쳇바퀴·2 쳇바퀴가 돈다. 내가 돌리는 이 쳇바퀴는 잘도 돌아가지만 돌고 돌아도 제자리다. 이른 아침부터 돌리고, 자정 넘어서도 빌빌거리지만 헛바퀴다. 도대체 무얼 돌렸는지, 왜 돌리고 있는지. 여전히 안개 속, 어쩔 수 없는 미궁이다. 해가 지고, 달과 별들이 떴다가 조는 사이 동이 트고, 해가 떴다. 강물은 엎드려 아래로 가며 햇살을 등 뒤로 받았다. 그저께는 쳇바퀴를 빨리 돌리다가 안 돌리느니만 못했고, 오늘은 새벽까지 빌빌대다 그 바퀴에 쓰러진 채 벼랑에서 떨어졌다. 깊이 모를 허공에 매달리고, 먼지처럼 떠돌았다. 이제야 간신히 꿈을 깨어나도, 세상은 거꾸로 가고 있는지, 물구나무서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내가 쳇바퀴를 돌리는 게 아니라 쳇바퀴가 나를 돌리고 있는 모양이다. (이태수·시인, 194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