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시 모음> 김재진의 '풀' 외 + 풀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김재진·시인, 1955-) + 풀·2 풀이 몸을 풀고 있다 바람 속으로 자궁을 비워가는 저 하찮은 것의 뿌리털 끝에 지구라는 혹성이 달려 있다 사람들이 지상을 잠시 빌어 쓰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풀은 흙을 품고 있다 바람 속에서 풀이 몸을 풀고 있다 (김종해·시인, 1941-) + 겨울풀 들새의 울음도 끊겼다 발목까지 차는 눈도 오지 않는다 휘파람 같은 나들이의 목숨 맑은 바람 앞에서 잎잎이 피가 돌아 피가 돌아 눈이 부시다 살아 있는 것만이 눈이 부시다. (이근배·시인, 1940-) +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풀꽃을 꺾는다 하지만 너무 여리어 결코 꺾이지 않는다 피어날 때 아픈 흔들림으로 피어 있을 때 다소곳한 몸짓으로 다만 웃고만 있을 뿐 꺾으려는 손들을 마구 어루만진다 땅속 깊이 여린 사랑을 내리며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에 노래 되어 흔들릴 뿐 꺾이는 것은 탐욕스런 손들일 뿐 (조태일·시인, 1941-1999) + 풀과 함께 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지 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 그런 날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어린 풀들 쑥쑥 머리를 내밀고 손을 들어 저요, 저요 한다 그 중에 튼튼한 녀석 하나와 단단하게 접붙고 싶다. (이승희·시인, 1965-) + 풀꽃 연가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풀은 풀대로 나는 나대로 변할 줄 모르는 풀하고 나는 아무래도 고향이 같은가 봐 도시에 살아도 먼 산 구름만 바라보다 해지면 어머니 품속 같은 흙이 좋아 흙을 베고 잠에 드는 풀꽃 내 고향은 심심산골 단양 너의 고향은 어디더냐 도시에 몇십 년을 살아도 풀 티, 산골 티를 못 벗는 풀과 나는 아무래도 본래부터 같은 부류였나 보다. (최영희·시인) + 부드러운 물살 같은 태초의 명령을 수행하여 보도블록에도 쓰레기더미에서도 부지런히 탄성 내지르며 솟아오르는 저 잡풀들, 저 잡풀들 겨드랑이로 스쳐가는 바람 바람 같은 힘, 때때로 비를 몰아다가 먼지를 씻겨주는 그 힘, 끝도 없이 먼지 먹고 사는 때 절은 이 도시에서 스스로의 힘만으론 씻을 수 없는 속내 먼지 닦아주는 부드러운 물살 같은 그 힘. (최서림·시인, 1956-) +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어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희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이파리 스쳐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아름 쓰러지는 풀아 영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강은교·시인, 1945-) + 풀의 기술 어머니가 일흔다섯을 기념하여 목뼈에 나사못을 박고 무릎을 인공관절로 바꾸고 안식에 들어갔다 기나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어머니가 다스린 땅은 매년 수만평이 넘었지만 어머니의 소유는 집터 포함 삼백평이었다 이제 어머니의 안식과 함께 그 땅도 휴식중이다 휴식중의 땅은 곡식 대신 풀을 기른다 어머니는 안식으로 풀을 기른다 풀을 기르며 풀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풀처럼 살아라 내가 이기지 못한 것은 저 풀밖에 없다. (조기조·시인, 1965년 충남 서천 출생) + 풀들한테 한 수 배우다 사람들한테 실망하고 세상일이 재미없어지면서 자주 들판에 나가 풀들을 만나고 풀이 좋아 풀의 모습 종이에 옮겨 그리다가 풀들한테 놀라고 풀들한테 한 수 톡톡히 배우다 어떠한 풀이파리나 꽃송이도 다만 그 모양새가 서로 닮아 있을 뿐 결코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 (사람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 어린 새순이나 꽃대로 어김없이 넓은 이파리가 감싸고 받들어 곱다라이 키운다는 사실 (어머니가 아기를 보듬어 안아 기르듯) 하물며 풀들도 저러하거늘 하찮은 풀들의 삶도 저러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거늘 아, 나는 이렇게 세상을 버리고 풀한테 눈과 코를 모으고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세상을 보고 있었고 풀과 풀들 사이에서 사람의 얼굴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 끝내 떠나지 못하고 말았구나 그것은 실상 어렵사리 세상의 중심으로 돌아가고자 오솔길을 여는 하나의 땀흘리는 노역의 시간일 수밖에 없었구나. (나태주·시인, 1945-) + 거부하는 풀 바람에 길들여진 풀들이 바람을 거부한다. 잎사귀 다 뜯긴 채 살아나는 야생의 풀들처럼 6월의 열풍에 풀들은 달구어진 쇠못이다. 붉은 쇠못 하나 말없이 뽑으려면 일제히 치솟는 분노가 함성처럼 푸르게 들녘 끝까지 파동친다. (최동호·시인, 1948-)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