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은 사나운 태풍도 두려워 않는다
산이 분노하는
화산이 터지고
하늘에 우레 치고 지진이 일어도
그래도
풀잎은 흙의 지지자일 뿐이다
(안도섭·시인, 1933-)
+ 어떤 풀잎은
맑은 눈빛 어린 아기빗방울이
뛰어내리다 다치면 어떡하나
어떤 풀잎은 몸을 비스듬히 해
미끄럼틀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어떤 풀잎은 몸을 깊숙이 숙여
조심스레 내려놓기도 한답니다
(강인호·시인)
+ 이슬 먹는 풀잎
끄트머리에 간신히 매달린 작은 방울
투명한 거울처럼 담아내는 그 속에
햇볕에 그을린 무지갯빛도 영롱하다
바람에 떨어질 듯 살랑거리는 방울
풀잎은 천성이 여유 있어 더디게 먹는다
(임남규·시인, 1964-)
+ 풀잎 이슬
풀잎도 때로는 눈물짓는다.
의지할 데 없는 길가에서
짓밟히는 아픔 쌓인 설움이
밤이면 잎가에 이슬로 맺힌다.
한여름 긴긴 뙤약볕에
고운 꽃잎을 피우기 위해
엷은 잎들이 파닥이다
구슬 같은 땀방울로 맺힌다.
땀과 눈물로 얼룩진
풀잎들에 얽힌 사연들을
지난밤 내린 맑은 이슬이
스스로 씻어 내리고 있다.
(박인걸·목사 시인)
+ 풀잎을 하나 따서
풀잎을 하나 따서
바라다보면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여린 잎
한 생애 동안
다 내어주니
가슴이 벅차 뛰었겠구나
풀잎을 한 아름 따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풀벌레 합창이
울려오는 것 같아
또르르 또르르
고운 음률은
파고를 넘어 물결치는데
지휘봉을 잡은
그대는 누구신가요
(김세실·시인, 1956-)
+ 우리나라 풀잎은
원래 조용한 말씀
순리대로 흔들리는 몸살이다.
늘 푸른 서슬을 지녔으되
오직 죽은 듯이 숨어서
숨쉬는 비밀이다, 아우성이다.
어쩌다가 비바람치면
말없이 눕는 듯 금세 일어나
새로운 바람이 되어
도처에 자빠진 혼을 깨운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모두들 깨어나 하늘을 보라,
저토록 너무 맑아서
오히려 눈물겨운 하늘을 보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 뿌리 내린 풀잎은
저마다 물오르고 피가 뛰어도
모른다 모른다고 손을 젓는다.
비가 오면 젖은 만큼 기울고
바람이 불면 그 무게대로
흔들리는 天性이다, 몸짓이다
우리나라 풀잎은.
(임영조·시인, 1943-)
+ 풀잎의 고요
낮아져서,
한없이 낮아져서
풀잎에 부는 바람이 될까요
물처럼 바람처럼 낮아지면
가벼운 생이 되어
흐르는 구름으로 떠다닐까요
광활한 세상
오직 당신의 지순한 사랑에
젖고 젖으면서
내가 살아갈 수 있다면
가슴은 기도로 열려있는
길이 될까요
길가엔 향기에 젖어있는
작은 풀잎들이 깃털처럼 흔들리고
멀리 묻혀서 사는 사람의 마을
닫혀있던 문들은 활짝 열리겠지요
낮아져서
끝없이 낮아져서 내가 머무는 곳
풀벌레 소리에도
여린 눈물 자국을 남기며
떨고 있는 누군가의 말소리 들리겠지요
(변종환·시인, 1950-)
+ 풀잎에서 영원으로
나 오래 전부터
영원한 것이 있다고 들었지
너무 깊고 아득하여
그것을 나는 허망한 꿈으로만 여겼다네
그러나 저것 좀 봐
우리가 문득 들길을 지날 때
바람 속에 숨어 있는 이상한 숨결이
풀잎 하나를 조용히 흔드는 것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저쪽의 항구에서
바람은 불어와 정박한 배들을 깨우고
영혼의 닻줄도 풀어주네
그러므로 나는 말하리
풀잎이 바람에 안겨 낮은 소리로 속삭일 때
그 곳 가까이 귀를 잠시 열어두며
영원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이진엽·시인, 1956-)
+ 통통거리는 풀잎처럼
풀밭에서
산언덕에서도
내 짝꿍 개똥참외 녀석들은
곧잘 닭싸움을 하지.
두 눈 부릅뜨고
두 입술 말아몰고
두 손으로 한 발을 들어잡고
통통거리는 풀잎처럼
폴딱폴딱 뛰어다니며 싸우는
내 짝꿍 개똥참외 녀석들을 보면
가장 신나는 웃음꽃이 피어나지.
오뚝이처럼 뛰어다니며
몇 녀석을 쓰러뜨리고도
힘이 넘치는 듯 언제까지나
풀밭을 온통 통통거리며
팔딱팔딱 뛰어다니며 놀고 있지.
(이준섭·시인, 1946-)
+ 마른 풀잎들
문 닫힌 공장 철망 담장 너머로
늦가을 찬바람이 쌔앵 몰려간다
봄날, 처녀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마른 풀잎들 앙칼지게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