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 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문정희·시인, 1947-)
+ 나이를 먹으며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손바닥에 얼굴 묻고 샛눈을 뜨면
나무 속에 살고있던 빛, 소리, 향내에 취해
술래는 자주 셈을 잊었다.
나무의 목소리로 침묵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는데
눈 떼고 돌아다보면 어느새 세월은
나 몰래 까치발로 바작바작 다가와 있었다.
한 그루 나무와도 다 놀지 못한 채
내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김향숙·시인)
+ 나이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지
세월 속에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보고 난 뒤
내 이마의 주름살들을 보고 난 뒤
난 그에게 대답했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사실 난 아무것도 세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살아 온 세월에 대해서는
그가 나에게 말했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명해 주세요
그래서 난 말했지
어느 날 불시에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에게
입을 맞추었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을
나의 날들이 너무도 많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만을 세지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이었으니까
(류시화·시인, 1958-)
+ 나 서른이 되면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 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려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가을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 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잘 길들여진 발과
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발을 함께 달고서
그렇게라도 걷고 걸어서
나 서른이 되면
그것들의 하나됨을 이해하게 될까.
두려움에 대하여 통증에 대하여
그러나 사랑에 대하여
무어라 한마디 말할 수 있게 될까.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가는 개미들처럼
그 주검으로도
어린것들의 살이 오른다는 걸
나 감사하게 될까 서른이 되면
(나희덕·시인, 1966-)
+ 마흔 살
강물이 끝나는
그 자리가 바다이듯
젊은 눈물 마른 나이에는
눈물의 바다에 이르고 마는가
이제 나의 언어는 소리 높은 파도
한번을 외쳐도 천만 마디 아우성이며
이제 나의 몸짓은 몸부림치는 물결
천만 번을 풀어내도 한 매듭의 춤사위일 뿐
그래 마흔 살부터는 눈물의 나이
물길밖에 안 보이는 눈물의 나이
(유안진·시인, 1941-)
+ 마흔 다섯
마흔 다섯은
귀신이 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
참 대 밭 같이
참 대 밭 같이
겨울 마늘 낼
풍기며
처녀 귀신들이
돌아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
귀신을 길를 만큼 지긋치는 못해도
처녀 귀신허고
相面은 되는 나이.
(서정주·시인, 1915-2000)
+ 나이가 수상하다
치아가 편치 않다
나이가 들쑤신다
아아주 옛적에는 떡이나 과일을 깨물어
치아 자국으로 임금을 뽑았다니
이가 좋아야 임금이 될 수 있어
잇금이다가 이사금이다가 임금이라 불렀다니*
나이도 나의 치아, '나의 이'의 줄임말 아닐거나
나이[年齡]라는 한자에 이 치(齒)를 넣은 중국인들도
'나의 이' '내 이'를 나이로 기준 삼아
연령을 뜻했는가
사과 한쪽을 집으려다 얼른 주춤한다
보기만 해도 시리고 저린 나이
치과 한번 간 적 없는 나의 이가 쑤신다
정말 이젠 낡은 나이인가.
(유안진·시인, 1941-)
+ 7학년 8학년 9학년
놀이터에 아이들만 오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오신다
70대는 7학년
80대는 8학년
90대는 9학년
8학년 할아버지가
"범구야, 이리 좀 와 보렴." 하면
7학년 할아버지가
"왜요, 형?"
하면서 지팡이 짚고 달려가고
9학년 할머니가
"철우야, 하드 하나 먹으련?" 하면
"네, 누나." 하면서
8학년 할아버지가 쪼르르 달려간다
가끔은 누가 누가 더 형이고 누나고 오빠인지
싸우다가 토라져 돌아앉기도 한다
(이병승·시인, 1966-)
+ 낙과소리를 들으며
짧은 가을 석양에는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다른 때에 비하여
어찌 그리 쓸쓸한가
아침이나 한낮에는
다 익으면
햇빛과 바람과 수분을
아름답게 겉으로 내뿜으며
하늘 속에 있는 전수명을 다하고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겨
마지막을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때는 덜 느끼는 것이지만,
그렇게 적막강산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주위가 해지기 얼마 전에는
그럴 수 없이 몸에 스미는
아, 짜릿하고
어딘지 모르게 울고 싶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 멸망의 몸짓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이 소리를 아직도 알 수 없는 가운데
나는 벌써 오십 고개를 몇 해 넘겼네.
(박재삼·시인, 1933-1997)
+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들면
더 분주한 삶을 살아야 한다
경험이 많고 나어린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기 위해서이고
나이가 들면
솜이불처럼 따스하고 포근해야 한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늘 옆에 사람이 붙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이가 들면
웬만한 일은 웃어넘기고
편견은 절대 금물이다
치우침은 결코 손해뿐이니까
나이가 들면
어떠한 어려움에 봉착해도
정도로 가야 한다
평생 쌓아 올린 덕이 무너지므로.....
나이가 들면
동지 팥죽처럼 빛도 좋고
부드러워야 한다
그래야 귀염동이가 품에 안기므로...
(최형윤·시인)
+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이십 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 대에는
마흔이 두려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박우현·시인)
+ 인생을 위한 기도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꽃 같은 인품의 향기를 지니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늙어가더라도
지난 세월에 너무 애착하지 말고
언제나 청춘의 봄날로
의욕이 솟아 활기가 넘치는
인생을 젊게 살아가게 하소서
우러난 욕심 모두 몰아내고
언제나 스스로 평온한 마음 지니며
지난 세월을 모두 즐겁게 안아
자기 인생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지나간 과거는 모두 아름답게 여기고
앞으로 오는 미래의 시간표마다
아름다운 행복의 꿈을 그려 놓고
매일 동그라미 치며 사는 삶으로
인생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소서
가진 것 주위에 모두 나누어
아낌없이 베푼 너그러운 마음이
기쁨의 웃음으로 남게 하소서
여기저기 퍼지는 웃음소리가
영원의 소리가 되게 하소서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
한 줄씩 그어지는 주름살
나이가 들어 인생의 경륜으로 남을 때
자신이 살아오면서 남긴 징표를 고이 접어
감사한 마음을 안고
나머지 삶도 더 아름다운 마음 지니며
큰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인생이란 결국 혼자서 가는 길
살아온 날들이 너무 많아
더 오랜 경륜이 쌓인 그 무게
노여워도 노여움 없이
무조건 마음으로 모두 나누어주어
아무 것도 마음에 지닌 것 없이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 게
마음의 부자로 여기며 살게 하소서
(이효녕·시인,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