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 시 모음>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 외 + 화살과 노래 나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화살은 땅에 떨어져 간 곳이 없었다. 빠르게 날아가는 화살의 자취 누가 그 빠름을 따라갈 수 있었으랴. 나는 허공을 향해 노래를 불렀으나 노래는 땅에 떨어져 간 곳이 없었다. 누가 날카롭고도 강한 눈이 있어 날아가는 그 노래 따라갈 수 있었으랴. 세월이 흐른 뒤 고향의 뒷동산 참나무 밑동에 그 화살 부러지지 않은 채 꽂혀 있었고 나의 노래 처음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친구의 가슴속에 숨어 있었다. (롱펠로우·미국 시인, 1807-1882) + 내가 화살이라면 내가 화살이라면 오직 과녁을 향해 허공을 날고 있는 화살이기를 일찍이 시위를 떠났지만 전율의 순간이 오기 직전 과녁의 키는 더 높이 자라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팽팽한 허공 한가운데를 눈부시게 날고 있음이 전부이기를 금빛 별을 품은 화살촉을 달고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고독의 혈관으로 불꽃을 뚫는 장미이기를 숨쉬는 한 떨기 육신이기를 길을 알고 가는 이 아무도 없는 길 길을 잃은 자만이 찾을 수 있는 그 길을 지금 날고 있기를 (문정희·시인, 1947-) +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멀리 보내기 위하여 가능한 뒤로 당겨야 하고 스스로 낮춰야 하고 결국은 놓아야 하거늘 앞으로 앞으로만 위로 위로만 손에 쥐려고 애쓰는 건 늦겨울 앙상한 고목처럼 참으로 볼품없는 것 버리기도 비우기도 연습 없이는 안 되는 일 습관처럼 모두 내려놓아야 갱생(更生)하는 길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느리지만 빠른 듯 빠르지만 느린 듯 아프지 않게 자유로울 수 있게 (공석진·시인) + 화살표 이것 하나 남기고 가는구나 따라가 보니 주검 있었네. (홍해리·시인, 1942-) + 당신의 화살 나는 당신이 기르는 한 마리의 새 입술에 불을 물고 어디든 날아올라요 쏘세요, 지상의 어디든 나는 가서 당신의 말씀을 충직하게 전해요 희고 부드러운 당신의 손가락 당신의 퉁김을 받음으로써 나는 행복합니다 이날의 敵적이 어디 있는가를 당신은 알고 있어요 표적에 꽂혀 부르르 떠는 나의 황홀한 최후를 당신은 사랑하지요 그래요,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안녕 하고 당신의 손끝을 떠날 날을 기다려요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하늘을 가는 나는 당신이 기르는 한 마리의 새 (김종해·시인, 1941-) + 큐피드의 화살은 부러졌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행복한 시였던 세상에서 가장 긴 슬픈 시였던 그대 우리의 바보 같은 그림은 지워질 줄 몰라 아직 그대는 달콤하고 그리움은 씁쓸해 가끔은 아주 가끔은 텅 빈 가슴이라도 열 수 있다면 행복하겠는데 그날 바보 같은 그날 큐피드의 화살은 부러져버렸다 (강효수·시인, 전북 남원 출생) + 화살나무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손택수·시인, 1970-) + 화살이 날아온다 화살이 날아온다. 눈에 안 보이는 화살이 날아온다. 가슴을 찌른다. 눈을 찌른다. 귀를 찌른다. 코를 찌른다. 나는 화살을 맞고 비틀거린다. 나는 화살을 맞고 기운을 차린다. 오늘도 화살이 날아온다. 오늘도 화살을 맞고 살아간다. (변학규·시인, 1914-?) + 화살의 길 화살은 직진하지 않는다 뱀처럼 구불구불 공기 속을 뚫고 나간다 망설이며 흔들리며 길을 찾아나간다 힘껏 당겨져 활시위를 떠났더라도 제 길 찾아간다는 건 이렇게나 힘든 것 돌이킬 바로 그 때를 놓치지 않는 감각이 화살의 길을 만든다 잠시 지나치면 범하고 마는 제 안의 텅 빈 고요 오만 가지 생각들이 분자운동하는 공기의 저항 속 긴 시간은 주지 않는 대지의 引力 속을 가로질러 내 과녁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천성이 맺힌 데 없는 빈 마음의 나는 대단하지 않은가 (김연숙·시인, 1953-) + 화살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컴컴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용사여 영령이여! (고은·시인, 1933-)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