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 시 모음> 나태주의 '황홀극치' 외 + 황홀극치 황홀, 눈부심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함 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음 어쨌든 좋아서 죽겠음 해 뜨는 것이 황홀이고 해 지는 것이 황홀이고 새 우는 것 꽃 피는 것 황홀이고 강물이 꼬리를 흔들며 바다에 이르는 것 황홀이다 그렇지, 무엇보다 바다 출렁임, 일파만파, 그곳의 노을, 빠져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황홀이다 아니다. 내 앞에 웃고 있는 네가, 황홀, 황홀의 극치다 도대체 너는 어디서 온 거냐? 어떻게 온 거냐? 왜 온 거냐? 천 년 전 약속이나 이루려는 듯. (나태주·시인, 1945-) + 황홀 시시각각 물이 말라 졸아붙는 웅덩이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오직 웅덩이를 천국으로 알고 살아가던 송사리 몇 마리 파닥파닥 튀어 오르다가 뒤채다가 끝내는 잠잠해지는 몸짓 송사리 엷은 비늘에 어리어 파랗게 무지개를 세우던 햇빛, 그 황홀. (나태주·시인, 1945-) + 황홀 그대― 이 황홀한 시 앞에 무엇을 더 노래해야 할까 어둠 밝히는 불빛은 많고 많은데 그대 앞에 암담해진 내 영혼은 어떤 등불로 밝혀야 할까 (정숙자·시인) + 황홀한 거짓말 <사랑합니다> 너무도 때묻힌 이 한마디 밖에는 다른 말이 없는 가난에 웁니다. 처음보다 더 처음인 순정과 진실을 이 거짓말에 담을 수밖에 없다니요. 겨울 한밤 귀뚜라미 거미줄 울음으로 여름밤 소쩍새 숨넘어가는 울음으로 <사랑합니다> 샘물은 퍼낼수록 새물이 되듯이 처음보다 더 앞선 서툴고 낯선 말 <사랑합니다> 목젖에 걸린 이 참말을 황홀한 거짓말로 불러내어 주세요. (유안진·시인, 1941-) + 황홀 그 노래 못 믿을지언정 등뒤에 분명 그윽한 눈길, 꿈속일지도 모를 남루한 내 옷깃에 옥수(玉水) 물보라 적시이는 일 고개 돌려보면 알 테지 아니야 한번 돌아본 탓에 소금기둥 된 롯의 아내처럼 될 텐가 아니야 송구하고 황홀하여 차마 못 믿을지언정 눈 내리듯 조용히 임하신 한 어른이 문설주 끄르시고 등위에 가득히 달밤으로 넘치심을 (김남조·시인, 1927-) + 또 하나의 황홀 겨우내 칼바람이 모란의 마른 뼈 속으로 파고들어 앙상하더니 봄햇살 곱씹고 마시어 야드르 야드르 살이 차 오른다 외길 집념 지친 흔적도 없이 일으키는 불꽃 앞뜰이 붉게 타오른다 점심나절 봄볕이 배가 불러 낮잠에 빠진 모란 꽃잎 한 장씩 고이 접는다 만삭의 봄, 긴 해가 아직 한발이나 남았는데 (송연우·시인, 경남 진해 출생) + 황홀한 연출 참 곱게도 수놓았다 신의 조화인가 내 조국 금수강산 황홀했던 벚꽃 자리 녹색 물결 출렁이고 그 물결 따라 홍매화 라일락이 장관이다 땅에는 노란 민들레 그 옆에 색색의 영산홍 자연은 오색 바통 주고받으며 계주를 한다. 누가! 내 조국을 금수강산이라 말했던가 (하영순·시인) + 황홀한 배회 햇살에 걸려 넘어진다 어제 먹은 술 때문인지 햇살에 걸려 넘어진다 그 긴 밤을 뜬눈으로 견디었다 붉은 눈을 하고서 무엇엔가 자꾸 걸리는 아침 햇살을 잉태한 건 밤이었다 나를 잉태한 건 밤이었다 광화문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는데 누군가 내게로 왔다 밤새도록 먹은 것들을 토하는데 햇살이 가만히 와서 내 등을 두드려 준다 (이재훈·시인, 1972-) + 황홀한 고백 비가 오지 않아도 흠뻑 젖는 날이 있듯 비가 흠뻑 내려도 가슴이 쩍쩍 갈라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쉿! 겁내지 마라 대지는 누군가 밟고 지나간 패인 상처에 보란 듯이 꽃을 피워낸다 우린 그렇게 밟힌 자리에 뜨거운 체온을 버무려 꽃을 피우는 웅덩이 하나씩 갖고 사는 것 사랑과 이별, 행복과 불행은 늘 삶의 바깥과 안 사이를 오고가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인 것 저 너머에서 봄이 오듯이 그대 아픈 자리에 배냇짓하는 꽃망울 나 원시의 초록으로 일어나 상처를 덮을 것이니 그대 사랑의 늪에 빠졌다 해도 자신의 귀를 잘라내는 고흐의 절망은 잊어라 지나가보면 모든 수렁은 황홀한 것 그곳에서 낯선 생명의 기쁨을 맛보리니 (조윤주·시인, 경기도 가평 출생) + 황홀한 구린내 변기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힘껏 밀어냈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고통스럽게 세상에 나온 것 그것은 한 편의 시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은 변비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황금빛 똥이 아니더라도 자주 자주 밀어낼 수만 있다면 하루에도 몇 그릇의 밥을 먹고 똥통을 깔고 앉아서 코를 벌름거리며 시똥을 싸리라. 한 편의 시가 풍기는 이 황홀한 구린내. (정성수·시인, 1945-) + 내 황홀한 묘지 낡은 서랍 가득 낡은 브래지어가 쌓여 있다 어느 야산의 공동묘지처럼 구슬피 쌓여 있는 봉분들 제 명대로 세상을 누려보지 못하고 어느새 황홀하게 망가진, 가끔은 한없이 우스꽝스러운 욕정의 쭉정이 같은 것들 더 이상의 수치심도 없이 거실 바닥이나 욕실 세면대 위에 상스럽게 나앉아 있는 한때 어떤 것은 에로틱한 우상이었다 매력 없는 이 박색의 세상도 추근덕거려 보고 싶은 그렇게 실제보다 몽상의 사이즈를 더 부풀리는 몽실몽실한 마력의 봉우리였다 쾌락의 육질을 감싸 안은 황금빛 실루엣이었다 이제는 터지고, 해지고, 뭉개진 탄력의 감촉을 잃은 진무른 송장에 불과한 , 시골 어는 삼류화가의 싸구려 춘화처럼 흥분시킬 그 어떤 상징도 메타포도 없이 골방 구석지기에 천박한 자태로 누워 있는 흉물 단 한 번도 희비의 오르가즘에 도달해 보지 못하고 생매장당한 내 젊음의 불쾌한 흔적인 저 젖무덤들, 푹푹 썩어드는 저 황홀한 관짝들 (이기와·시인, 1965-) + 황홀하다! 광활한 우주의 한 점 먼지일 뿐인 내가 또 하나의 먼지인 너를 어쩌다가 만나 눈맞아 사랑을 하고 태양 같은 아이들을 낳고 기쁨과 슬픔 웃음과 울음 속에 살다가 아스라이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황홀하다!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