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 " 장마 "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진실의 파악과 이를 통한 자기발견을 거쳐
성숙의 슬기에 이르려는 독자들을 위해 [오늘의 작가 총서]는 선택적
독서의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이 되려고 한다."
이것은 "오늘의 작가 총서를 내면서"라는 제목을 가진 민음사의 변
마지막 문장이다
물론 나는 민음사의 바람처럼 시대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나 자기
발견을 위해 이책을 선택한것은 아니다. 또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성숙의 슬기에 이르게 되기에는 나는 준비되지 않은 너무 작은 존재
인지도 모른다.
장마철을 보내면서 [장마]라는 책을 책꽂이에서 꺼내게 된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인지도 모르겠다. 장마의 시작과 함께 얘기가 시작되고 장마의
끝을 알리는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로 소설은 끝나고 있지만 나는 이제
책을 읽은 느낌을 나름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주인공 "나"는 국민학교 3학년의 철없는 어린아이다.
이미 성인이 된 "나"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회고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어느날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나타난 외할머니는 친할머니의 배려로
사랑채에서 기거하게 된다. 외할머니는 자신의 이빨이 뽑히는 꿈에
강한 집착을 보이면서 장교 후보생으로 군에 입대한 아들의 죽음을
절망적으로 예언한다. 한밤중에 억수로 내리는 비속을 뚫고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들게 되어 보란듯이 예언을 적중시켰으나 이미
예언으로 모든 준비를 한듯이 '나사 뭐 암시랑토 않다. 진작서부텀
이럴 종 알고 있었응게 나사 뭐 암시랑토 않다'는 중얼거림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대신하는 의연함은 땅을치고 통곡을 하는 아픔보다
더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니알 아적까장 눈도 뜨지말고 죽은디끼 자빠져 자야 된다'는 어머니의
바람을 저버린 어린 "나"는 눈을 떳어야할 중요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들어서는 안될 어른들만의 비밀을 알게된다. 좌익에 물들어 이산 저산으로
쫓기고 있던 삼촌이 밤을 틈타 잠시 집안에 들르게 되었고, 아버지의 설득
으로 자수를 결심하게 되어 정황을 살필 기간동안 다시 대밭에 숨어있게
된 사연을 모두 엿듣게 되어 버린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는 쵸콜렛을 미끼로 교활하게 추궁해 들어오는 수사관을
당하지 못해 비밀을 발설하기 이른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오랏줄에 묶여
가고, "나"는 '짐승만도 못한,과자 한 조각에 제 삼촌을 팔아먹은, 천하에
무지막지한 사람백정'이 되어 할머니의 눈밖에 나게 된다.편을 들어 외손자를
감싸고 돌던 외할머니가 할머니와 의가 나는건 당연지사였고 "나"는 외할머니
차지가 되어버린다.
생사를 모르는채 아들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소경 점장이를 찾게 되고
점장이의 예언을 신앙처럼 맹신하게 되어 아무날 아무시에 꼭 돌아온다는
희망적 예언에 여러 가족들을 들볶는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절망적 예언이
적중했듯이 그 철저한 준비와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아무날 아무시에 찾아든
것은 삼촌이 아니라 커다란 구렁이였다. 할머니는 기함을 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고 외할머니는 마치 삼촌이 구렁이로 환생하여 온듯이 음식으로 달래고
할머니의 머릿카락을 태워 갈길을 인도해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할머니는
그동안의 묵은 감정을 정리하게 되지만 끝내 할머니는 숨을 거두고 만다.
두 할머니와 그 아들들 즉 "나"의 삼촌과 외삼촌이 이야기의 핵심인물인
[장마] 는 친가와 외가라는 친족적 관계를 시작으로 삼촌과 외삼촌이 사상을
달리함으로해서 좌익과 우익을, 그로인해 생긴 가정의 아픔을 넘어 분단의
비극으로까지 확산된다.
이글을 읽으면서 내가 재미있게 느낀 부분은 외할머니의 꿈과 할머니의 소경
점장이의 예언에 대한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에 가까운 믿음에 관한 부분
이다.실세를 잃고 이미 한걸을 물러나 있는 가족관계에서 꿈이나 점장이의
말을 빌어 온 가족들을 쥐고 흔드는 부분은 재미와 함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을 암시하고 있는듯한 신비함까지 들게 한다.
또한가지 간과할수 없는 부분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이다.
특히 지역적 배경이 전라도여서 그 찰지고 인정미 넘치며 사람의 마음을
풋풋이 담아내는 사투리는 의미의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구석이있다.
언젠가 [태백산맥]을 읽고 난 후 전라도 사투리가 입에 붙어 한동안 떠나지
않아 영어책을 읽으면 영어가 이렇게 달라붙으려나 하는 시덥잖은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났다.
이책에는 내가 처음 대하는 생경스런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발음에서
오는 묘한 느낌과 빈틈없는 단어를 적재적소에 꽂아넣은 작가의 탁월한 선택
이야 말로 이책을 읽는 묘미가 아닐수없다.
우리말의 소중함이나 사투리의 구수함, 옛 노인의 정감을 느껴보고 싶으신
분들께 이 책을 권하고 싶다.
1996. 8. 26 ran401...
하이텔 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