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잿빛입니다.
처음으로 이사를 하는 날인데 말입니다.
아무리 겨울이래도 오늘 같은 날은 맑아야 덜 우울할 것 같은데.
하늘까지 나를 속상하게 만듭니다.
2차 개발로 쫓겨나듯 이사 가는 우리 식구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사라고 해봐야 도로 하나만 건너면 되는데도 말이죠.
경운기에 짐을 옮기다 말고 다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바라봅니다.
스무 해 동안 살던 나의 집을 만져봅니다.
이젠 벌레까지 나와서 더 이상 살 곳이 못되는데도 왜 이리 슬픈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몰래 빠져나와 집을 한바퀴 돌아봅니다.
우물이 있던 곳으로 가서 주인 없는 개 집안을 바라봅니다.
금방이라도 꼬리를 치며 누렁이가 달려들 것만 같습니다.
개밥이 엉겨붙은 그릇을 그 안에 들여 놉니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 그물을 만져보고 쥐에게 인사를 합니다.
장독이 있던 뒤뜰로 가봅니다. 차마 다 가져가지 못하는 장독들이 원망하는 눈길로 날 바라봅니다.
뚜껑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숨어있고 싶어집니다.
이젠 다 살펴보았으니 다시 짐을 옮기러 가야겠습니다.
발을 옮기려는데 메마른 손이 내 옷을 잡아 다닙니다.
뒤돌아보니 쓸쓸한 웃음을 짓고 있는 감나무가 날 부릅니다.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었는데...
뛰어가 감나무를 껴안고 맙니다.
'미안해- 미안해' 라고 속삭입니다.
나무는 아무 말 없이 날 안아줍니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결국 난 울고 맙니다.
나무는 자기를 버리고 가는 주인을 원망하지 않고 늘 그랬던 것처럼
나뭇가지를 부딪혀 듣기 좋은 음악을 들려줍니다.
나는 울면서 나무주위를 빙빙 맴돕니다.
나무는 나를 따라 나뭇가지를 빙- 돌립니다.
난 어느새 이사간다는 사실을 잊은 채 유년시절로 빠져들고 맙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무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듣기론 아빠가 태어나시던 날 심어졌다고 합니다.
분명 아빠보다 몇 살 더 많았을 테지만 난 또 한 명의 아빠처럼 감나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두 세 명이 힘을 합쳐야 겨우 품에 안을 수 있던 나무는 멀리서도 다 보일 정도로 큰 키를 자랑했고,
담 밖까지 팔을 뻗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팔을 꼬집히곤 했습니다.
그런 나무를 볼 때마다 아빠가 이발을 해주었지만
나무는 여전히 담 밖으로 팔을 뻗어 등교하는 내 머리를 만져주곤 했습니다.
나무엔 꼭 허리띠 같은 톱질 자국이 있었고, 더 이상 크지 못하도록 나무의 중간쯤엔 쇠사슬이 묶여 있었지만
병 한번 안 걸리고 홍시를 나무 가득 달아두곤 했지요.
나무는 심술나면 감 꽃이나 감잎을 마당 한가득 뿌려놓고 날 부릅니다.
왜 심술나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나무를 달래주고 그가 어질러 놓은걸 치웁니다.
치우는데도 계속 나무가 감잎을 떨궈서 날 화나게 만듭니다.
결국 난 빗자루를 집어던지고 나무를 때리며 '그만해'라고 외치지만 나무는 여전히
머리를 흔들어 잎을 떼어냅니다. 내 머리 위에도.
머리 위에 얹혀진 감잎을 코에 갖다 대봅니다.
떫은 감 냄새가 날 자극시킵니다.
언젠가 소설에서 본 마른 나뭇잎 태우는 장면이 생각나 라이터를 가져와 나도 감잎을 태워봅니다.
매캐한 연기는 눈물나게 하지만 좀 전의 감잎보다 더 떫은 감 냄새가 납니다.
한참 냄새를 맡다보니 나무는 화가 풀린 듯 조용합니다.
살짝 째려보니 나무는 조용히 자고 있습니다.
나도 나무위로 기어올라가 같이 잠을 잡니다.
나무의 푸른 숨소리에 맞춰 숨을 쉽니다.
우린 하나가 되어 그곳에서 잠이 듭니다.
아빠에게 혼이 났습니다. 울면서 또 다른 아빠 감나무를 찾아갑니다.
'괜찮니' 하고 물으며 날 안아줍니다.
마른 나무냄새가 내 속상한 기분을 풀어줍니다.
울은 걸 들켜 부끄러운 마음에 나무를 빙빙 맴돕니다.
나무도 나를 따라 나뭇가지를 빙- 돌립니다.
나무도 나도 깔깔대고 웃고 맙니다.
나무가 나를 놀립니다. '울다가 웃으면-' 하고.
나도 나무를 놀려댑니다. '그러다 나뭇가지 부러지겠다-' 하고.
어디선가 돗자리를 찾아와 나무 아래 누워봅니다.
나무는 얼른 그늘을 만들어 해를 쫓아냅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토라진 해가 보입니다.
나는 살짝 윙크를 하고 나무를 향해 웃어줍니다.
나무도 '사르르' 하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냅니다.
이번엔 책을 들고 와 소리내어 읽어갑니다.
발음이 좋지 않은데도 나무는 책 내용이 재미있는지 듣고만 있습니다.
개미가 같이 놀자고 달려들었지만 외면하고 계속 읽어다보면 어느새
밤이 되고 맙니다.
나무와 인사를 하고 개미를 땅에 내려놓고 집으로 가보니
아빠는 화가 풀려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빠의 환갑이 찾아왔고 나무도 정년퇴임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풍년이던 감도 열리지 않고 손으로 살짝 만지기만 해도 껍질이 벗겨지고
나뭇가지가 툭툭 떨어졌습니다. 처음으로 나무가 아파합니다.
태풍이 와도 끄떡없던 나무도 나이 앞에선 무릎을 꿇게 되는 모양입니다.
아빠가 병석에 눕자 충목(忠木)이라도 된 듯 나무도 죽어갑니다.
결국 몹쓸 병을 못이기고 아빠가 돌아가시자 나무는 생기를 잃고 맙니다.
나무를 안아줘도 나무는 웃지 않습니다. 그늘을 만들지도 못합니다.
그렇게 나무는 생명을 다해갑니다.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벌써 짐을 다 나른 모양입니다. 아직 작별인사도 못했는데.
나무는 있는 힘을 다해 나를 안아줍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주인에게 웃어줍니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옵니다.
이삿짐을 대충 정리하고 다시 그 집에 가봅니다.
멀리서 보이던 나무는 마치 요술이라도 부린 듯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우리 집이 맞는데. 나무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아빠가 나무를 데려간 듯 밑동만 나를 반겨줍니다.
밑동만 남은 그가 '보기 흉하지' 하고 부끄러운 듯 웃어줍니다.
난 대답도 못하고 밑동 주위를 빙빙 맴돕니다.
속상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자꾸만 맴돌았지만
기분은 여태까지 풀리지 않습니다.
벌써 육 년이 지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