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하신 몸으로 제 방 한켠에서 옷도 채 벗지 못하시고 주무시는데,
그 옆으로 다 식은 붕어빵 한 봉지와 서투른 맞춤법으로 쓰신 작은 편지를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춥게 입고다니셨던 것 같습니다.
참 오랜만에 진지하게 하고싶은 말 전하려고 하는데 저 일만 생각나는걸 보니
꽤 많이 감동했던 것 같습니다.
흠.. 어떤 말씀부터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남자의 인생? 또는 가장으로서의 인생이 얼마나 당신께 많은 짐이 되었을지
아직은 모르는 아홉 수 라서 지금 제 기준에서 하고싶었던 말을 전해드려 볼게요.
제 기억으로는 중학교를 입학할 때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IMF와 함께 하시던 일이 기울기와 동시에 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
아버지의 건강문제가 함께 왔던 즈음이었을거에요.
아마 그때부터 저는 아버지가 많이 다른 사람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하기를 두번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두분의 싸움이 이어지곤 했죠.
두분의 인내를 믿었기에 집안에 불편한 일들이 없도록 하고 싶어
그저 친구들과 그런 일들이 없는 듯이 생활하다 보니 별일 없이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저는 어머니와 가까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감정이 상하신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만남 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어머니의 기준으로만 말씀드린다면 어머니는 꽤 손해보는 결혼을 하셨다고 생각했고요..
아버지의 행동들이 그렇게 좋은 모습이 아닌게 더 많아보였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아버지의 항상 취하신 모습과 고부갈등을 방관하시는 모습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저와 동생에 대한 무관심 등이 커지면서 아버지의 모습에 점점 부담과 거리를 느끼게 되더라고요.
고등학교 2학년인지 3학년인지 하교 후 집에 왔을 때 집에서 모든 집기를 다 부수시고
욕설을 하고 계시던 모습을 보고 그동안 어머니가혼자 일하시면서 저희 둘을 돌보시느라
힘들어하시던 모습과 대조를 이루었고 아마 그동안 제게 두려움의 대상이기만 했던 아버지가
그땐 적으로 보였는지 이성을 잃고 아버지께 덤볐던 날이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겁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하셨는데, 아버지는 이렇게 돌려주는 것 같아 그땐 정말 화가 났었어요..
그 전부터도 집에는 자주 들어오시지 못했지만, 그게 안들어오시는지 못들어오시는지 모르고
그날 이후부터는 거의 귀가가 없다시피 했던 모습에 저도 오기를 부려가며 차라리 잘됬는지 몰라
라는 철없는 생각들을 하고 지냈는데, 거의 3년만에 제 부사관학교 임관식에 오셨더라고요..
부사관학교에서 훈련받는 동안 또 무슨일이 있었는지 두분은 그날도 아무말씀 없으셨고
이후에 동생에게 따로 들은 말로는 많은 일들이 있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17살 이후 4년만에 거의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21살이 될 때 까지 아버지와 제가 독대하며 이야기를 나누어 본게
10번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고서는 휴가때 마다 일하시는 곳에 들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24살이나 되야 아버지랑 소주 한잔 할 수 있게 되었더라고요..
내가 그날 그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많았고 그렇게 다시 좋아지는가 했는데
그때 즈음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 그 폭발이 처음 알게된 아버지의 외도라는 걸 알았을 때
짧지만 깊은 반성은 다시 깊은 골로 바뀌더군요..
그렇게 또 상처뿐인 시간이 지나고 전역할 때 즈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말을 듣고
긴급히 병원으로 갔을 때에는 다행히도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하시는걸 보고 안도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깊은 골이 의미없다는 생각도 했고 이젠 그냥 아버지가 살고싶은 인생을
사시도록 해드리는게 맞는건가 하면서 어머님을 많이도 설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사이 어머님은 제가 부대에 있는동안 아버지와의 관계의 끝으로 자살시도까지 하셨어요.
아버지는 그날 응급실에 오시지 않았죠.
그때가 25살이었네요.
고액의 병원비와 하시던 사업에 부채까지 어쩔 수 없이 부담하셔야 했던 채무들이
퇴원 후에도 아버지를 압박했던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IMF당시 사업으로 인한 부채와 병상으로 일을 하지 못하신 동안 어머니 홀로 저희를 키우시고
채무를 하나도 갚아나가지 못했던 상태라 저라도 도움이 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타던 자동차를 팔고 일부 저축과 대출을 더해 급한 불을 끈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불이 잠잠해짐과 동시에 우리 가족을 완전히 떠나신거죠.
아무 말씀도 없이 그냥 그렇게 가버리시더라고요.
어머니는 그날이후의 충격에 우울증이 있으셨지만 나름 많이 호전되셨고,
비슷한 처지의 친구분을 만나 서로 위안삼으시면서 살고 계십니다.
그렇게 저와 어머니 동생은 아둥바둥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후로 5년 이제 서른이 되었는데, 12월 마지막 원리금을 치루면 그 채무도 끝이 나네요.
채무를 갚아나가는 동안에는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결혼이나 안정된 생활이 남들보다 많이 늦어졌고, 부모 덕을 본다는 친구놈들이
마냥 부럽기만 한 것도 있었어요.
넉넉한 환경에 공부를 조금 더 했다면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그렇게 15년 가까이 몇번 뵌 적도 없이 지나고 저도 결혼할 만한 좋은 여자친구 하나
만들어 놓고 나니 오늘같은 명절날에는 아버지가 생각이 납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는 금전적, 정신적 부담과 스트레스들을 십수년동안 가지고 사셨을텐데
저 때문에 아버지께 더 짐이되지는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잘하셨다고 말씀드리기는 싫어요.
어떤 내용으로도 아버지가 하신 모든 일들이 결과적으로 잘한일이라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가끔 길거리에서 만취해서 쓰러진 사람들을 보면, 아버지가 혹여 저렇게 되시진 않을까 하는 생각과
간암, 뇌출혈과 같은 지병이 다시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는 돌아오시겠지 하는 말은 아버지에게나 저에게나 그냥 원망으로 남아버린 것 같아요.
다행히 고모나 할머니와 함께 잘 지내시고 계시는 것 같아 안부는 묻지 않겠습니다.
어머니라는 사람은 아직도 아버지 걱정을 하신다는 것만 알아주시고, 아프지만 말아주세요.
제가 혹여 결혼이라도 하면, 손주라도 생긴다면 그땐 한번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두서없이 혼자 떠들기만 한거 같은데 이게 그래도 최대한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서요.
가족간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지만 또 원망을 아주 버리지는 못할 것 같아요.
못된 아들놈이라고 소문내셔도 좋고 욕하셔도 좋은데,
참 많은 시련에 저도 힘들었다는거 한번 쯤은 생각해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