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증거들 (21일 21시 12분, 경찰서]
김형사는 복도를 후배와 신경질적으로 걸어가고 있다.
“자살도 아니야. 가족들 알리바이도 완벽해. 거기다 집 안에는 온통
가족들 지문, 모발만 가득해. 하다못해 피부 껍데기도 가족 것만 있어.
차라리 아무런 증거가 없다면 몰라도 범인 것만 없다니.”
김형사는 감식반에서 받은 서류를 공중에 휘두르며 말했다.
후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김형사 옆을 따라 걸었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사람을 죽이고, 자기 DNA 증거만 빼내서 지웠다는 거야?
그래 몰래 들어갔다 그냥 나올 수는 있어. 그런데 살인을 하고 흔적을 모조리 지운 뒤에
가족들이 귀가하기 전에 사라졌다고? 하다못해 다리털이라도 떨어져야 하는 거 아냐?
야, 니네 애들 제대로 한 거 맞어? 말이 안되잖아. 그럼 자살이란거야 뭐야!!!”
“선배는 왜 자꾸 저한테 신경질을.. 저도 답답합니다.
자살가능성은 희박하지. 증거는 안나오지... 위에선 쪼아대지... 미치겠습니다.”
“하.... 그 새끼 무슨 신이야 뭐야.”
김형사는 강력반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박형사. CCTV 받아왔어? 오형사랑 최형사도?”
“아 네, CCTV랑 통화내역 뽑았구요. 그리고 피해자 스마트폰도 저희가 받아와서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 주민등록번호로 가입된 사이트에 연락해서 기록도 받았구요.”
“CCTV부터 보자.”
김형사는 자신의 외투를 책상 위에 던지고 자신의 자리로가 신경질적으로 앉았다.
“읊어봐.”
김형사가 의자에 앉은 채로 말했다.
“부검결과 피해자는 20시에서 21시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사체 발견이
빨랐기 때문에 거의 확실하다고 합니다. 부검의 말로는 20시 25분 즈음 일거라 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에 있는 CCTV도 그 시간대를 조사했고, 피해자는 20시에 엘리베이터
CCTV에 포착되었습니다. 일단 보시죠.”
CCTV에는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 민재의 모습과 곧 이어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민재가
확인되었다. 엘리베이터 CCTV 속의 민재는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도달할 때 까지 거울을
보고 머리를 만지고 휴대폰을 확인하는 등의 평범한 모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도달하고 문이 열리자, CCTV를 보던 김형사가 입을 열었다.
“쭉쭉 넘겨봐.”
그 이후로 사건발생 시간이라 예상되는 20시 25분을 지나 21시까지 십여 명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탔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20시와 21시 사이에 엘리베이터를 탑승한 사람 중 가족들이 귀가한 22시 이전에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빠져나온 사람은 택배기사 뿐이었습니다.”
“CCTV는 저게 전부야? 비상계단은? 계단으로 올라갔을 수도 있잖아.”
“네, 그렇긴 한데 계단에는 CCTV가 없다고.”
“결국 용의자가 없다. 이거지.”
“물론 20시 이후에 탑승한 승객들을 한명씩 찾아서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휴.. 그래 고생 좀 해.
오형사, 피해자 통화내역이랑 핸드폰 조사는.”
“아, 사건이 일어난 15시경부터 피해자의 형, 부모님, 학교 친구들 뭐 이정도로 연락을 한 것 같습니다.
꽤 연락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15시 이전 기록이 없어요.
통신사 말로는 그 시각에도 피해자의 휴대폰으로 몇 개의 메시지가 전송은 되었는데 피해자가 확인을 안 하고.
발신지도 확인 안되는 걸로 봐서는 아마 휴대폰을 꺼놨던 것 같습니다.”
“휴대폰을 꺼놨다고?”
“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통신사 측에서도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실제로 스마트폰
기기에서도 10시부터 15시까지 전원을 껐다는 기록이 확인 됐구요.”
“오형사, 피해자 통화기록 사건 당일 말고 뽑을 수 있는 기간 최대한 길게 해서 뽑아 봐.”
“얼마나요?”
“아~ 몰라몰라, 제일 길게. 무조건 제일 길게.
최형사. 뭐 좀 나왔어?”
“아.. 네. 저도 사이버수사팀에 의뢰를 했는데요. 음... 그.. 피해자.. 민재 군의
주민등록 번호로 가입된 포탈페이지 5개. 그리고... 온라인 게임이...”
최형사는 한 뭉텅이나 되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야-야-야! 나 속 터진다. 그냥 포털사이트에서 피해자가 검색했던
키워드 있지? 그것만 불러봐.”
“아. 그게 별게 없습니다. 모의고사 배치표. 그리고 학교 숙제를 조사 했고.
날씨나 연예인 이름. 온라인 게임. 아!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네, 피해자는 아니고요. 아마 피해자의 형이 종종 피해자의 컴퓨터를 썼던 모양인데,
피해자 형의 아이디로 자동로그인된 쿠롬의 GOOCLE 사이트 검색어가 좀..”
“검색어가 뭔데.”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자동 로그인이 되어있었는데 그때 검색한 키워드가
밀실살인, 영구미제사건, 자살, 살인, 자살 지옥, 희생, 천국, 성경, 지문체취방법,
DNA수사, 과학수사 등입니다.”
“뭐? 확실해?”
“네, 피해자 형의 아이디로 로그인된 상태였고요. IP도 분명 피해자의 집이 맞습니다.”
“뭐야, 그럼 피해자의 형이나 피해자가 검색했다는 건데.
둘 중에 누군지 확인 가능해?”
“아마 피해자일겁니다. 비슷한 시간대에 피해자가 자신의 아이디로 다른 홈페이지도
접속을 했고요. 그 컴퓨터로 비슷한 시간대에 온라인게임도 접속을 했더라고요.”
“최형사는 그럼 피해자 형의 아이디로 GOOCLE에서 검색된 키워드 로그 좀 받아와.
최대한 많이. 최대한 옛날 것부터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김형사는 의자에 한껏 기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마치 눈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퍼즐들이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퍼즐들은 있어.
하지만 문제는 퍼즐이 아니야.
문제는 퍼즐판.
대체 어떤 판에 끼워지는 조각들인지.’
김형사는 그런 생각들을 하다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잠이 들었다.
[22일 오전 9시 12분]
김형사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던 김형사는 눈을 감은 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귀에 가져다 댔다.
“누구야.”
“접니다 오형사. 통화기록을 확인했는데요. 기존에 비해서 21일 15시부터 연락한 사람들이
확실히 비정상적으로 많습니다. 그 중에는 몇 달간 연락을 안했던 사람도 있고요. 그리고...”
“아, 됐어. 일단 복귀해.”
김형사는 통화를 끝내고 눈을 떴다.
‘피해자는 자신이 그날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시간까지.’
김형사는 휴대폰에서 최형사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최형사가 전화를 받았다.
“최형사. 로그는 받았어?”
“네, 지금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파일 보낼까요?”
“됐고 키워드 불러.”
“아.. 작년 12월 31일에 게이, 호모, 게이 지옥, 게이 성경, 정신병, 자살 지옥, 게이 치료,
에이즈 이런 걸 검색했고요. 그리고 좀 이상한 게..”
“제발, 한번에 해라. 한번에.”
김형사는 이제 의자에서 일어나 또렷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네 작년 여름에 이경이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엄청 했더라고요. 이경 A중학교,
이경 A고등학교, lee kyung, leekyung@hetmail.com 이런 식으로요.”
“이경? A중학교, A고등학교. 알겠어. 나머지 애들한테 서둘러서 복귀하라 그래.”
김형사는 책상위의 외투를 들고 복도로 향했다.
5. 진범.
김형사는 차를 타고 이경의 집으로 향하면서 보고받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김형사님, 부탁하신 걸 확인했는데요. 이경이라고 피해자랑 중학교 동창입니다.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더라고요.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접점이 없는데요.
이경은 현재 자취를 하고 있고 주소는...’
김형사는 차 엑셀을 더 강하게 밟았다. 구식자동차는 굉음을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경의 집 근처에는 이미 박형사, 오형사가 도착해있었다.
“집에 있는 것 같아?”
“네, 전기계량기 돌아가는 걸 보면 있는 것 같네요.”
“좋아, 가자.”
김형사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 답답한 퍼즐조각들을 서둘러 이경이라는 퍼즐 판에 맞춰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똑.똑.똑
똑.똑.똑.
“김형사님 없는 거 아닐까요?”
오형사가 조용히 물었다.
“아냐, 안에 있어. 분명히.”
김형사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때 문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작고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아 학생, 주인집 아저씬데 잠깐 문 좀 열어봐.”
잠시 후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조금 열렸다.
김형사는 문을 낚아채 활짝 열고 이경을 바라보았다.
이경은 벙거지 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이경이지. 민재.. 알지.”
김형사 묻자 이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형사는 신경질적으로 이경이 쓰고 있는 모자를 벗겼다.
“너..”
모자가 벗겨진 후에도 이경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김형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머리를 삭발한 이경의 정수리였다.
김형사는 오른손으로 이경의 턱을 쥐고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 이 새끼...”
이경은 눈썹도, 속눈썹도 없었다. 심지어 얼굴은 사포로 문지른 듯 붉게 상기되어있었고
군데군데 흉터가 보였다. 김형사는 이경을 노려보았지만 이경의 눈동자는 여전히
바닥을 향했다. 김형사가 이경이 입고 있는 스웨터의 팔을 걷었다. 이경의 팔을 보던
김형사는 아예 이경의 상의 스웨터를 벗겨 버렸다.
이경의 몸은 깨끗하게 면도되어 있었다. 게다가 때수건으로 얼마나 강하게 문질렀는지
피부는 붉게 상기되어있었고 군데군데 피딱지가 보였다. 김형사는 뒷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 이경의 팔에 채우며 말했다.
“이경, 널 김재민 살인 용의자로 체포한다. 넌 묵비권이 있어. 그리고 변호사도 선임해도
돼. 니가 하는 말이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 수도 있어. 또 진술 거부도 원하면 가능하고.
알겠지.”
이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6 - 1. 그날의 기록 (1)
경찰서에 도착한 이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형사가 로그 기록과 이경의 집에서 나온 재민의 지문,
그리고 이경의 집에 있던 재민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가지고 추궁하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경의 집에서 재민과 찍은 사진이 발견되자 이경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2월 19일 오전 10시 04분
재민과 이경은 이경의 자취방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재민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이경이 낯설어 보였다. 몇 년을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보고 지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재민은 오른 손을 내밀어 재경의 왼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모른척해도 된다. 지금이라도.’
재민은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이미 재민의 얼굴은 이경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씩 이경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한편으로는 터질듯한 심장고동이
느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다가왔다.
그렇게 재민과 이경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맞춤을 했다.
재민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재민은 고개를 숙였다.
‘어쩔수 없다.’
재민은 자신이 이경을 사랑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확인했다.
자신의 감정들을 몇 번이고 분해하고 재조립하고 온갖 연역적 추리를 동원해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 아님을 입증하는 명제들을 상상했었다.
자신의 감정에 수없이 다른 대명사를 가져다 대어 보았다.
하지만 이 순간,
재민은 전제 없이 언제나 참인 결과만이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은 본능 같은 공리(公理)였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자 오랜 시간 재민을 괴롭혔던 모든 순간들이 제 자리를 찾은 듯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충만함이 커질수록 재민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선명해졌다.
재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경을 바라보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는 어느 때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이경은 차분히 재민의 말을 들었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집밖으로 나갔고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재경의 손에는 이런저런 물건들이 있었다.
6 - 2. 그날의 기록 (2)
재민은 동네 마트에서 구매한 가위와 면도기로 이경의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다.
그리고 이경의 눈썹과 목 뒤의 잔털을 면도기로 정리했다.
면도기는 천천히 목뒤를 따라 이경의 등 뒤로 향했고, 이경은 간지러움에 웃고 재민은
장난스럽게 이경의 등을 때렸다. 팔, 허리, 겨드랑이, 음모, 허벅지, 다리까지 차근차근 재민은 이경의 몸에 있는 잔털들을 정리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태어나 처음으로 자세히 본 순간이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이경은 핀셋을 꺼내 자신의 속눈썹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재민은 그런 이경을 보고 입을 열었다.
“어쩌면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닐 거야.”
그러자 이경이 핀셋의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대답했다.
“희생만이 남는 사랑이라면 그렇겠지.”
이제 이경은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고, 재민은 이경이 처방받은 수면제를 가지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재민이 나가는 소리를 들은 이경은 때수건으로 자신의 몸을 긁어
내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이경의 피부는 붉게 상기되고 작고 붉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왜인지 이경은 아프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이경은 오늘 새로산 옷들을 정성스럽게 두겹씩 입었다.
20시 재민이 집에 도착했다.
20시 15분 이경이 재민의 아파트에 도착한다. 이경은 제일 꼭대기 층을 누르고
꼭대기 층에서 내린 뒤 계단을 통해 재민의 집이 있는 13층으로 향했다.
20시 25분 이경은 열려있는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재민의 방으로 향했다.
재민은 침대에서 잠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이경은 재민의 상체를 일으키고 뒤에서 재민을 끌어 앉은 채 재민의 귀에 대고
짧게 속삭였다.
그리고 이경은 자신이 준비한 밧줄을 꺼냈다.
6 - 3 그날의 흔적.
이경의 진술이 끝나자 김형사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뱉었다.
그때 이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민이는 종종 초코바 이야기를 했어요.
너무나 맛있는데 가격이 비싸서 사먹지 못하겠다고.
소풍을 가서 초코바를 먹으면 혼자 먹어야 되는데, 그러긴 싫다고 했어요.”
이경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우리의 죄를 일정부분 나눠서 짊어지기로 했어요. 그러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죠.
하지만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진 않았어요.”
김형사는 자기도 모르게 뱃속 깊숙이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곤 이경의 말에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애써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자제했다.
“하지만 전 죽을 수 없었어요. 저마저 죽는다면 재민이의 희생만이 남고
재민이의 사랑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테니까요.”
너무나 철 없는 말들이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둘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형사는 최대한 자신을 자제하며 이경에게 물었다.
“꼭 이래야만 했니.”
“재민이는 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재민이는 또 자기 자신보다 가족을
사랑한다고도 했어요. 재민이는 초코바를 먹기엔 가족을 너무 사랑했어요.”
7. 케이스오버 (23일 오전 9시 12분)
재민은 가족들이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길 바랬다.
가족들이 스스로를 미워하기 보다는 영원히 잡히지 않을 살인범을 미워하길 바랬다.
조금만 운이 좋았다면 가족들은 재민의 바람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슬픔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책망하고 원망할 상대가 그들에게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재민이 완전 범죄를 꾸미며 가족들에게 주고 싶었던 면죄부였다.
김형사는 일부러 하루 밤의 여유를 두고 다음날 아침 재준에게 연락했다.
재준은 오래지 않아 경찰서에 도착했고, 김형사는 재준을 조용한 취조실로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김형사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재준은 김형사의 얘기를 들으며, 놀란듯 하다가도 차분해졌고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도
입을 다물었다. 허공을 바라보기도 했으며 이내 눈을 감기도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재준이 입을 열었다.
“하드디스크는 어디 있습니까.”
“저희가 확인을 해 보았습니다. 하드디스크는 벌써 몇 번이고 포맷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복구가 될 수도 있지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포맷한 후에
이걸..”
김형사는 서랍 아래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노트북 화면에는 재민의 가족사진이 떠있었다.
“이 파일만은 다시 하드디스크에 옮겨 뒀더군요.”
“그럼 CCTV는 어디 있습니까. 재민이 마지막 모습이 담긴.”
재준은 이유 없이 서둘렀다.
김형사는 노트북을 잠시 만지곤 화면을 띄워 재준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너무나 평범하게 서있는 재민이의 모습이 보였다. 재준은 멍하게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내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도착하고 재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김형사가
화면을 끄기 위해 마우스를 움직였다.
“잠깐.”
재준이 김형사의 손을 막았다.
“왜 그러시죠.”
김형사가 물었지만 재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준은 재민이 내린 엘리베이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거기에 새로운 장면이 보였다.
바로 재민의 그림자였다.
재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의 센서등이 켜졌고 그로인해 생긴 그림자가 CCTV에 잡힌 것이다.
그 그림자는 아주 잠시 제자리에 섰다가, 이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 주저 앉은 것이다.
재준은 힘겹게 입을 연다.
“재민이는 CCTV에 대해서 알았을 거에요. 똑똑한 아이니까요. 겨우 버틴 거겠죠.”
재준의 말을 듣고 강형사는 다시 화면을 쳐다보았다.
화면에는 재민이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CCTV 화질 탓인지 그림자는 가늘게 떨리는 듯 보였다.
“이경!! 이경은 어디 있습니까.”
재준은 자신도 놀랄 만큼 큰소리로 강형사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강형사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재준은 복도로 나갔다.
마침 복도에는 이경이 이송되기 위해 형사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재준은 본능적으로 복도 끝에서 끌려가는 사람이 이경임을 알았다.
“이경!”
그러자 복도 끝의 이경이 멈칫하고 뒤를 돌아봤다.
재준은 거칠게 달려들어 이경의 멱살을 쥐었다. 형사들이 재준을 말리려 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이-경!!!”
재준이 이경을 쥐고 강하게 흔들자 이경이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경은 모자가 벗겨진 후에도 여전히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준은 이경의 정수리를 정면으로 보았다.
여기저기 상처가 난 이경의 머리에는 며칠 만에 짧은 머리카락이 솟아있었다.
그 머리카락들은 너무 짧아, 모자에 아무리 눌려도 어디로도 향하지 못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조금만 더 길었다면 좀 더 유연 했을텐데, 그랬다면 아무리 모자가 강하게 눌러도
자신의 방향을 잡았을 텐데.
“조금만.. 조금만..”
재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이경의 멱살을 쥐었던 손을 풀고 이경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재준은 울기 시작했다. 조용히 시작된 재준의 울음은 흐느낌이 되고 이내 통곡으로 변하고 고함으로 변했다.
결국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재준은 이경의 발목을 잡고 목 놓아울었다.
복도에는 재준의 울음이 길을 잃고 이리저리 메아리치고 있었고,
복도의 큰 창으로 비추어져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이 그런 재준과 이경을
감싸듯 내리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