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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나는 여인상 하나를 조각했습니다.
상아로 만든 여인상이었어요. 톡톡 두드리면 둔탁한 소리가 났습니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그 소리가 못 견디게 좋았습니다. 당신도 들어봤다면 틀림없이 매료됐을 거예요. 그건 분명 근사하고, 매력적인 소리였으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고, 온종일 그녀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소리 없이 웃었어요. 당신도 그 미소를 볼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녀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지상에 숨 쉬는 이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고, 계절이 지나도 영원했지요.
그녀와의 시간은 늘 황홀했습니다. 그녀의 핏기 없는 몸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차갑고 딱딱한 입술에 입을 맞출 때면 근사한 행복이 내 곁을 맴돌았어요. 사람들은 내게 손가락질을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그녀는 내 이야기에 늘 변함없는 미소를 지어주었고, 그녀 앞에서만큼은 나는 유쾌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나는 언제까지고 그 시간이 영원할 거라 믿었습니다. 마치 늘 같은 꿈을 꾸는 어린 아이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나의 믿음과는 달리, 행복은 금세 끝났어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모두 내 잘못입니다. 어리석은 나의 욕망이 고개를 든 거예요. 지혜롭거나 가난한 노인들은 항상 말하곤 합니다. ‘행복은 가까이 있다.’ 그 말을 지켜야 했는데, 나는 만족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나는 신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녀에게 생명을 내려달라고, 그녀의 텅 빈 눈과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달라고. 그리고 오랜 정성에 감동한 여신은 마침내 그녀에게 생명을 내려주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일어나자 사랑은 끝났습니다. 그녀가 숨을 내쉬자마자 나는 그녀의 딱딱한 어깨가 그리워졌어요. 나와 사랑을 나눈 이는 오직 숨 쉬지 않는 그녀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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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했던 여자들
1. 여자들
#Note1
세상에 밤이 찾아온 것은 2012년의 어느 겨울이었다. 마야인들이 지구 종말을 예언한 것보다 조금 빠른 시기였다. 그 밤의 어둠은 유난히 짙고 끈적끈적했고, 어둠을 밀어내는 거리의 가로등은 힘겨워보였다.
“완전한 밤이 찾아왔어. 세상은 어둠에 잠길 테고, 낮이란 말은 영원히 잊혀질 거야.”
꼬부라진 혀로 나는 말했다. 민중은 낄낄댔다. 이거 SF소설이었어?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낮을 잃은 세상은 빙하기에 잠긴 것처럼 추웠고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날카로운 겨울바람은 술에 취해 무뎌진 감각을 불편하게 일깨웠다. 지구의 종말이 코앞으로 다가왔대도 거리의 네온사인들은 여전히 화려했다. 여자들은 두터운 코트를 걸치고 하얀 입김을 내쉬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가오는 여자들 중 검정색 퍼 자켓을 입은 여자 앞에서 멈췄다. 짧은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다리가 매끈했다.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 위의 입술은 매혹적으로 붉었고 바지 속의 친구는 들썩거렸다.
“오빠들. 놀다갈 거지?”
바들바들 떨며 말을 거는 여자의 얼굴은 마침내 살았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전면이 유리로 된 입구를 지나자 조명과 벽지가 온통 붉은 빛인 방이 나왔다. 친구들은 그곳을 ‘정육점’이라고 불렀다. 여자는 우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곤 다른 여자들을 데려왔다. 여자들의 생김새는 제각기 달랐지만 모두 값은 같았다. 민중은 우리를 데려온 검정색 퍼 자켓을 선택했다. 나는 그 옆의 노랑머리를 가리켰다. 노랑머리는 피식 웃음으로 대꾸했다. 값을 치르고 우리는 여자들의 안내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노랑머리의 방은 싱글 침대와 작은 TV가 전부였다. 여자들을 고르던 방보다 좀 더 어두운 붉은 빛의 조명이 방 안에 감돌았다. 여자는 내게 샤워를 하고 오라고 했다. 나는 느릿느릿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엔 다녀간 남자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검은 털들이 어지러이 엉켜있는 욕실의 하수구를 보며 나는 샤워 대신 찬물로 세수를 했다. 얼룩진 거울 속엔 낯선 남자가 들어있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남자의 턱 끝을 바라보며 나는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 아래 숨은 그의 이빨은 누랬고 나는 도망치듯 등을 돌려 욕실을 빠져나왔다.
욕실을 나가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노랑머리의 알몸이 나를 반겼다. 살덩이 하나 없이 깡마른 몸이 두 다리를 살짝 벌린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나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낯선 침대 위에 누웠다. 내 성기는 형편없이 축 늘어져 있었고 노랑머리는 덜 익은 과일을 먹듯 성의 없이 내 성기를 삼키고 뱉었다. 노란 머리카락들이 몇 번 내 배 위를 쓸었고 마술처럼, 누워있던 성기는 딱딱해졌다. 몇 번 더 애무를 하고 노랑머리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나는 그 위에 올라탔다. 노랑머리는 능숙하게 오른손으로 내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 왼손으로는 자신의 그곳에 젤을 발랐다. 젤을 바르는 노랑머리의 그곳은 물기 하나 없이 말라있었다. 나는 다시 거울 속의 낯선 남자를 떠올렸다. 노랑머리의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녀의 몸은 차가웠다. 뒤로 하든 앞으로 하든, 기계적인 신음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고 맥없이, 나는 사정했다.
민중은 나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그는 다시 술을 마시자고 했다. 술이라면 취할 만큼 취한 상태였지만 거리의 어둠은 여전히 완연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휘적휘적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무작정 걸었다. 사창가를 벗어나자 거리는 금세 고요해졌다. 얼어붙은 거리엔 우리뿐이었고 우리는 상품 평을 나누듯 소비한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쪽은 생각보다 가슴이 작았어. 그래? 영혼까지 끌어 모은 가슴이었지. 그래도 허리놀림이 죽여줬어. 과연 물 빼는 기계들이군. 우리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Sound of Music’이라는 이름의 바였다. 빌딩 숲 한 가운데 통나무로 지어진 그곳은 독하고 값비싼 양주를 파는 곳이었다. 잔고는 이미 바닥난 뒤였고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민중은 전에 보지 못했던 신용카드를 꺼냈다. “아까 길에서 주웠어.” 희멀거니 웃으며 민중이 말했고 나 역시 그를 따라 멍청한 웃음을 흘렸다.
들어선 바의 TV에선 지구 종말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지구 종말을 확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그들은 지구의 네 배 크기에 달하는 행성X가 지구에 접근해 지구의 자전축을 눕혀버린다든지, 태양폭풍이 밀어닥친다든지, 중국의 주역을 재해석한 그래프인 타임웨이브가 2012년 12월 21일을 끝으로 0을 나타낸다든지를 지구 종말의 근거로 내세웠다. 그들은 지하벙커를 만들고, 끊임없이 식량을 비축하고, 인터넷으로 사람들에게 지구 종말론을 전파하며 남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지구를 멈추고 있었고 나는 그들보다 먼저 멈춘 나의 지구를 생각했다. 낮이 사라진, 점점 얼어붙어가는 나의 작은 지구.
민중은 조니워커 블랙을 주문했다. 편백나무로 만든 부드러운 인상의 테이블 위에 양주를 따라 마실 잔들과 얼음, 아이스티가 놓였다. 첫 잔은 희석시키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이 속을 훓고 지나갔다. 바의 오디오에서는 퀸의 Love of my life가 흘러나왔고 대화 대신 우리는 그것을 따라 흥얼거렸다.
Love of my life Can’t you see
Bring it back, bring it back
Don’t take it away from me
Because you don’t know
What it means to me
노래를 신청하기도 했다. 민중은 계속해서 퀸의 노래를, 나는 한동안 듣지 않았던 레이첼 야마가타의 노래를 신청했다. 퀸과 레이첼이 연달아 흘러나왔고, 잘 빠진 여성의 몸매처럼 허리가 홀쭉한 술잔은 채워지고 비워지길 반복했다. 술잔에는 ‘by pygmalion’이라는 문구가 새겨져있었다.
“피그말리온이라니. 어때, 근사하지 않아?”
술잔에 적힌 문구를 보며 민중은 말했다. 귀에 익숙한 단어였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민중이 여러 번 언급했던 단어였다. 그러나 내 기억은 그 정도에서 멈췄다.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민중은 그새 잊은 거냐고 물었다. 고장 난 녹음기가 된 것 같았다. 그의 엄숙한 얼굴이 우스워 나는 킥킥댔지만 민중은 웃지 않았다.
그것은 빈번하게 인용되는 그리스 신화 중 하나였다. 민중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혹시나하는 생각으로 내 얼굴을 살폈지만 나로서는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오래 전 피그말리온이라는 뛰어난 조각가가 있었는데........
피그말리온이 살고 있는 섬엔 그가 사랑할만한 여자들이 없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상아로 만든 자신의 여인상뿐이었다. 그는 여인상을 어루만져주고, 닦아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입을 맞추며 헌신적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정성에 감동한 여신이 그의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다. 놀랍게도 그 조각상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어 그의 곁에서 숨쉬기 시작했다.......
“그것 참 부러운 이야기군.”
“예전에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결코 부러운 이야기는 아닐 테지. 약은 먹고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민중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단숨에 독한 술을 삼키는 그의 표정은 씁쓸했다. 나는 민중의 그런 얼굴이 보기 싫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지?”
“피그말리온이 가엽다고, 너는 말했었지. 네 글에도 썼던 문장이야.”
양주 하나를 다 비우자 우리의 눈은 반쯤 풀렸다. 계산대에서 민중은 주운 신용카드를 꺼냈다. 나는 카드 단말기에 [도난 신고 된 카드]따위의 문구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단말기는 긴장감 없이 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영수증을 뽑아냈다. 영수증을 받아들고 우리는 죄책감이 들기보단 오묘한 쾌락을 느꼈다. 오를 대로 오른 술기운은 우리를 더욱 들뜨게 했고,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여자들이 있는 가라오케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여자의 몸을 더듬으며 맥주를 마셨다. 여자는 교태로운 자세로 내 품에 안겨 내가 하는 시덥잖은 농담들에 깔깔깔 웃어댔다. 내가 하는 말이면 모두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지구는 곧 종말할거야.” 내가 말하고 나면
“다행이네. 카드빛이 산더미였는데.” 이라는 식이었다.
맥주를 계속 들이키며 취기는 걷잡을 수 없이 올라왔다. 점점 여자의 말은 아득하게 들려왔다. 여자의 두터운 화장 아래로 다른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여자들은 입을 모아 내게 무언가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여자들이 나가고 난 뒤 우리는 계산대에 섰다. 민중은 바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운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나 카드 단말기는 이전과 달리 영수증을 뽑아내지 않았다.
“도난 카드라고 뜨는데?”
계산대에 선 마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고 동시에 민중은 내게 눈짓을 보냈다. 뛰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민중이 먼저 뛰쳐나갔고,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저 놈들 잡아!”
등 뒤에서 마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업원들이 음료수캔 따위를 집어던지며 우리를 뒤쫓았다. 그들이 던진 음료수캔 중 하나가 내 목덜미를 스쳤고 심장은 술기운이 달아날 만큼 거세게 요동쳤다. 달리는 동안 바닥은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나는 그제야 테이블 위의 맥주들을 남김없이 비운 것이 후회되었다. 비틀비틀 위태롭던 다리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고 쫓아온 종업원들의 손끝이 내 목덜미에 스치기도 했다. 다행히 종업원들은 달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덩치들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두 개의 사거리를 지나고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자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쫓아오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우리는 숨을 몰아쉬며 시멘트벽에 나란히 등을 기댔다.
“오늘 같이 놀았던 여자들 어때? 괜찮지 않았어?”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담배를 건네며 민중이 물었다. 괜찮은 밤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여자들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담배를 피워 물며 애써 밤의 기억들을 되살려보기도 했지만, 여자들은 얼굴 없는 인형처럼 어렴풋했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여섯시였다. 그러나 어둠은 여전했다. 이 어둠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밤의 적막 사이로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꺼먼 밤하늘엔 별 한점 보이지 않았다.
문득 Y와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와 나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가. Y의 목소리를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결국 찾아온 것은 다시, 여자들이었다. 밤의 적막 사이로 Y는, 아니 그녀들은 음울하게 속삭였다. 나는, 잊어버리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