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려 눈에 띄는 맥주 한 캔과 아몬드 땅콩을 집어든채 집에 들어선다.
내 방에는 그 흔하디 흔한 TV가 없다. 따라서 맥주를 마시면서 무엇을 해야할 지 매순간 결정을
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난데없이 맥주 한 캔과 결정의 순간이 이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가. 되물을테다.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정말 모른다.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사전적 의미와 우리가 아니 내가 느끼는 사랑의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때로는 가슴이 설레고 설렌
마음이 내 안의 나를 파고들어 아프기까지 할 때도 있다.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고귀한 순간이 있을 것인가. 사랑이란.. 이라고 정의 내리는 사람들은 정말 사랑을 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도 왜 그렇다고 느끼는 지는 모르지만 사랑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랑’의 의미는 어디론가 조금씩 날라가고 있지 않을까. 내 옆에 놓여진 맥주와 아몬드는 사랑을 알고 있을까. 그들에게 그
의미를 물어본다면 차가운 냉동실과 습기 없는 선반과 사랑에 빠져있다고 할 지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더 알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감정적으로
판단하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가슴 뜨겁게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순간들과 그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이 차가와진 맥주 캔과 건조하고 짭쪼름한 아몬드 조차도 사랑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사랑을 정의 내리기에는 이 우주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다. 꼭 그렇다고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일까.
연인과의 만남, 부모
자식간의 교감, 친구간의 우정, 사랑스런 애완 동물과의 친분
등. 여러 가지 색상의 사랑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라고 나는 이야기 하고 있다.
엉켜있는 실타래는 자신이 엉키어 있는지 느끼고 있을까?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물일지라 하더라도 자신 스스로의 현 상황을 인지하고 있지 않을까.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쓰여지며 일자로 매여있던 실 줄들이 어느 순간에 엉켜져 있는 실타래.
그를 생각하면 본인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모른다.라고 이야기 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다만 그렇게 된 것 뿐이다. 사랑도 그렇다. 다만 그렇게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더군다나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내 안에서 내 육신이 내 영혼이 ‘그것’을 느끼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모른 채로 두는 것.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그것이 사랑을 더 사랑스럽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