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는 프로포즈.
동해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무섭게 내렸다. 와이퍼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면서 채신의 시야를 확보해 주고 있었다. 채신은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모처럼의 애인(채신이 나를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과의 주말여행을 망쳐버렸으니 하긴 그럴만도 했다.
“비가 제법 많이 오는 군.”
내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화도 안 나? 우리 여행을 망쳐 버렸는데. 동해 바다를 볼 수가 없게 됐다고.”
채신이 짜증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불평을 터뜨렸다.
“그거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알았다고? 일기예보에서 비 온다고 했어?”
“아니. 하지만 예언가가 말해줬지.”
“예언가라니?”
“남들이 말하는 거야.”
남들이는 담배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의 별명이다. 그의 본명은 이 건이었는데 그가 남들이로 불리게 된 사연은 모든 일을 남들이 하기 때문에 한다는 그의 황당한 대답때문이었다. 나, 현준, 남들이는 같은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는데 사실 군대를 가기전까지는 서로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공교롭게 군대를 같은 시기에 갔고 같은 시기에 복학하는 바람에 복학생인 우리 세명은 쉽게 서로를 알게 된 것이었다. 나, 현준, 남들이가 처음으로 술자리를 가진 날이었다.
“술 잘 마셔?”
내가 남들이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남들이 마시는 만큼은 마셔.”
그때까지 나는 전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대답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남들이가 나와 소설가 지망생인 현준이하고는 달리 꽤나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내 생각은 완전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난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내가 왜 대학에 왔을까 하는... 대학에 오면 뭔가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만 먹게 되었지 배운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애. 넌 대학에 왜 온 거니?”
현준이가 남들이한테 물었다.
“남들이 가니까.”
현준은 그 성의없는 대답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빠진 눈으로 남들이를 쳐다보았다.
“니 여자친구 이쁘더라.”
내가 말했다.
“남들이 그렇게 말해.”
“그럼 넌 니 여자친구가 이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아니. 남들이 이쁘다고 하니까 이쁜 거지.”
“야, 군대까지 갔다 온 녀석이 자꾸 남들이 타령만 할거야?”
현준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군대도 남들이 가니까 갔다 온 거야.”
“너 그런 생각으로 군대생활은 제대로 했냐?”
“남들이 하는 만큼은 했어.”
이쯤 되자 현준은 말문이 막혔고, 나도 황당한 눈으로 남들이를 보았다. 조금 후 다시 현준이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넌 왜 사냐?”
“남들이 사니까.”
“남들은 죽기도 해.”
현준이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죽는 사람보다는 사는 사람이 많아. 만약 죽는 사람이 사는 사람보다 많은 세상이 오면 난 미련없이 죽을 거야. 남들이 죽으니까.”
“그렇게 남들이 하는 것만 하는 인간이 수학과는 왜 왔어? 수학과는 남들이 잘 선택하는 학과가 아닌데.”
“고 3 학생들이 대학 입시를 앞두고 담임선생님과 상의하는 것은 학생의 성적으로 어느 학교 어느 학과를 갈 수 있느냐지 학생의 적성이 아니야. 난 내 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의 학과를 선택한 것 뿐이야.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현준과 나는 더이상 남들이의 남들이 사상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남들이의 남들이 사상은 그 첫 술자리에서의 만남 이후로도 변함없이 계속됐다. 그는 여자친구랑 헤어졌을 때도 ‘내가 괜찮니? ’하고 묻자 ‘헤어지는 게 정상이었어. 남들도 다 헤어지거든’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고, 대학 졸업을 앞둔 4학년 2학기 때 ‘넌 졸업하면 뭐 할 거니?’ 하고 묻자 ‘취직, 남들이 다 그렇게 하잖아?’ 하고 대답하고는 졸업을 한 후 담배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그는 3년전에 결혼을 했는데 나와 현준이 찾아가서 ‘축하한다’고 말하자 ‘남들도 다 하는 일이야’ 라고 말했고, 1년전에 딸을 낳았을 때도 ‘남들도 다 겪는 일이야’ 라고 말했다.
“그 한심한 인간이 비가 올 걸 어떻게 알았다는 거야?”
남들이는 얼마전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채신이가 일하고 있는 학원에 수강생으로 등록했는데 채신이 첫 수업시간 때 남들이한테 ‘영어를 왜 배우려고 해요?’ 하고 묻자 남들이는 ‘남들이 배우니까요’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5년동안 인기 영어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채신은 수강생한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그 어이없는 대답에 황당해 했고 그 날 저녁 나는 도대체 니 친구들은 왜 그렇게 한심한 인간들뿐이냐고 하는 채신이의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욕을 한바탕 먹어야 했다. 사실 이 여행은 어느 정도는 남들이 때문에 나한테 화난 채신의 기분을 좀 풀어주려는 데 있었다. 이쁘다는 것과 영어를 잘 한다는 것만 빼곤 시체다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채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채신의 화를 풀어주지 않으면 또 언제 그 일로 나한테 따발총을 쏘아댈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채신이 계획한 주말여행은 남들이의 예상대로 비 때문에 엉망이 되고 있었다.
“그거야 내가 떠나는 여행이니까. 대학 다닐 때 우리 삼총사와 달타냥(달타냥이 누구인지는 뒤에서 얘기하겠다.)은 자주 시간이 나는 대로 셋이서 또는 넷이서 여행을 다녔는데 이상하게 내가 시간이 되서 여행을 갈 수 있던 날은 다섯 번 연속으로 비가 내렸어. 그 후로 남들이는 내가 여행을 떠나려고 약속장소에 나오면 또 비가 내리겠군 하고 말했지. 그리고 그의 일기예보는 언제나 맞아 떨어졌어.”
“도대체 그런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채신이 못마땅한 듯 나를 째려보았다.
“거짓말이라니? 난 사실을 말한 거야.”
“넌 내가 바본 줄 알아?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게. 난 영어를 할 줄 알아.”
“난 사실을 얘기한 거라니까. 내가 너한테 거짓말 할 이유가 없잖아?”
“넌 매사가 그래.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니까. 거짓말 한 걸 가지고 거짓말 했다고 말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래?”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겠다는 거야? 내가 영어로 말해야 사실을 믿어줄 거야?”
채신은 내가 똑같은 말을 영어로 하면 분명히 믿을 것이다. 그녀는 이 세상에 영어처럼 위대한 언어는 없다고 생각하는 영어선생이다.
“하지만 나는 영어를 못 해. 내가 할 줄 아는 영어라곤 고작해야 I love you, Would you marry me? 정도라고.”
“멋대가리 없이. 그걸 지금 프로포즈라고 하는 거야?”
채신이 화를 풀면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순간 나는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채신한테 청혼하고 싶은 생각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화가 나서 얼떨곁에 내 뱉은 짧은 영어를 청혼한 것으로 생각하는 채신한테 지금 한 말은 진심이 아니다 화가 나서 나온 말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나는 강심장이 못 된다. 설사 그렇게 말한다 해도 채신이 믿을런지도 의심스럽고. 나는 그런 긴 문장을 영어로 말할 줄을 모른다. 하여튼 채신은 대단한 여자다. 채신은 발화상황, 대화의 앞 뒤 내용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나의 짧은 영어만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말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아무리 화가나도 생각한 다음에 말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지 더 깊은 늪으로 빠지는 길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
빛인지 어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 비는 이미 그쳤는지도 모른다. 내 귀에는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옆집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괴성말고는 아무것도 들려오질 않았다. 여자의 괴성은 점점 더 커지고 나는 사정을 했다. 그리고 나는 늪에서 빠져 나왔다. 멋진 섹스였다. 나의 실수를 인정해야겠다. 난 너무 쉽게 채신을 정의내렸다. 채신을 다시 정의 내려야 할 것 같다. 채신은 이쁘고 영어를 잘하며 섹스상대로 최고라는 점을 빼놓고는 시체다로. 채신을 만나기 전에도 두 여자하고 섹스를 했던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군대가기전 총각딱지를 떼어보려는 마음에 창녀와 했고, 한 번은 6개월을 사귀다 헤어진 여자친구랑 했다. 하지만 두 번 다 이번처럼 황홀하진 않았다. 33인 채신이 지금까지 몇 명의 남자하고 섹스를 했는지 아니면 내가 처음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솔직히 내가 처음일리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뿐이며 사실 그런 것에 별 관심도 없다. 어쨌든 3년동안 내가 자신과 섹스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던 채신은 나의 어이없는 프로포즈로 결혼이 결정되자 나한테 섹스를 허락한 것이었다.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명언이 생각났다.
여자는 결혼을 위해 섹스를 한다.
하루가 지났다. 어제보다 빗줄기는 많이 약해져 있었지만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우린 오후에 서울로 돌아가려고 채신의 차에 올라탔다. 원래도 괜찮은 얼굴이었는데 칼로 더 이뻐진 채신의 얼굴을 흘끗 돌아보았다. 채신은 비때문에 동해바다를 못 본 것을 좀 아쉬워했을 뿐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내가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