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씩 힘들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리위로 흐르는 무료함이 차갑게 묻어났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드가 달린 두터운 빨간 점퍼 속에서 하얀 두 눈동자만 내놓은 채 마지막 떨이장사를 외치는 아줌마의 목소리조차 무성영화처럼 먹먹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그토록 기대했던 내일은 무심히 흘러 어제가 되고 이제 인생의 하이라이트 따위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숨 막힐 듯한 무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일을 안다고 해서 그 모든 일에 다정한 무관심의 거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나는 지쳐있었고, 그 공허함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인간도 아닐뿐더러 시간 또한 지나치게 넉넉했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멀뚱한 시선을 천장에 박아 넣은 채 한낮의 적막과 씨름하다 충동적으로 약간의 흥분이 섞인 자괴감을 품에 안고 집을 나선다.’ 는 식의 해프닝은 나 같은 인간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랄까. 떠난다. 라는 단어에 언제나 대단한 각오나 결의가 묶여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목적을 상실한 채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있다. 그것도 대단히 성실하고 자연스럽게.
하지만 나는 기차표를 구입하는데 적잖은 망설임을 느꼈다. 처음 집을 나섰을 때의, 그 무거운 기분 가운데서도 높이 피어오르던 설렘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같은 인간은 언제나 생각과 그 것의 실행을 연결하는 끈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어서 몇 번 잡아당겨보다 이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돌아서기에도 뒷맛이 켕겨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학생, 쉬었다 갈래?"
고개를 돌려보니 나이가 마흔은 넘었으리라 짐작되는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까만 오리털 점퍼와 나팔청바지 차림에 통통한 양볼 위로 미역을 붙여 놓은 것처럼 어색한 긴 생머리가 어딘지 묘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문장은 정확하게 들었으나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동안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예쁜 아가씨로 싸게 해줄 테니까 쉬었다 가. 학생 혼자지?"
그녀는 종이를 씹은 것 같은 탁한 목소리로 내며 내 팔을 잡아 당겼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 것은 거부감과 함께 덮쳐오는, 늦은 밤 청량리 역 앞에 혼자 나와 서성이고 있는 남자에게 주어진 어떤 의무감 같은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것이 마치 특별한 임무라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사실, 내가 그러지 말아야만 되는 이유도 없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로는 아무하고도 자지 않아 가끔은 간밤을 설치는 날도 있었던 것이다. 돈을 주고 여자를 산다는 것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 일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방안에서 지루함에 치를 떨다 문을 박차고 나온 그 순간부터 모든 세계가 오늘밤 허름한 여관방에서 이름 모를 여자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또 그보다 아주 조금 더 오랜 시간동안 정사를 벌이도록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눈치 챘던 것이다.
그 여자는 삼십분만 기다리는 말과 함께 초원위에서 벌거벗고 있는 여자가 한 쪽 벽면을 가득채운 방에 나를 처넣어버리곤 떠나버렸다. 방은 생각보다 깔끔했으며 스파욕조가 설치된 욕실은 훌륭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샤워를 할까하는 생각을 했으나 왠지 귀찮아져서 사들고 온 캔 맥주를 하나 집어 들어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갑을 꺼내 가진 돈의 액수를 확인하며 안도감을 느끼다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사진은 정확하게 말해서 2년 동안 사귀다가 6개월 전에 헤어져 이제는 연락한번 안하는 사이가 된 전 여자 친구와 내가 침대위에 나란히 누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어떻게 그 사진이 지갑에 들어있던 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때때로 감기처럼 찾아오는 그녀의 기억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괴로워해왔으면서도 말이다. 사진 속의 연인들은 너무나 완벽해보였다. 가슴 바로 위까지 올라온 크림색 이불은 너무나 따듯해 보이고 팝콘처럼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가득한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또한 그 사진속의 인물이 분명 나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저 행복한 구경꾼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추억과 후회의 기억들은 때로는 내 자신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기억할만한 모든 일들은 강 저편에서 꿈처럼 희미하게 피워 오르며 이런 사진 정도로만 겨우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 기억이 특별히 아름다웠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더욱더.
나는 사진을 지갑에 도로 껴놓고는 티비를 틀었다. 티비는 이럴 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난 잘 알고 있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를 춰야만 하는 번거로움도 없이 퇴비는 차분하게 적막함을 감싸준다. 티비 속의 연예인들은 춤을 추고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파트너에게 자신의 매력을 하나하나 열렬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기도 귀찮아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흐린 초점을 고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는데 달칵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 앞에는 레이스가 달리고 가슴이 깊게 패인 까만 원피스위로 까만 점퍼를 걸친 여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신발을 벗고 있었다.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몸을 약간 틀어 좀 더 날씬하게 보이려 애를 쓰는 듯했으나 솔직히 말해 육감적인 몸매는 아니었다. 사실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는데, 그 아줌마가 말한 예쁜 아가씨가 짙은 아이섀도와 두껍게 바른 파우더로 부챗살같이 얼굴 곳곳에 퍼진 주름살을 감추고 야한 속옷으로 옷을 갈아입은 스스로였다는 것이다.
나는 당황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저 자기방어적인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진지해보이기까지 하는 몸짓으로 서서히 점퍼를 벗고 문 바로 옆에 있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어깨 위에서 연약하게 매달려있던 원피스의 끈을 내리 버리고는 스스로 나체가 되어버렸다.
"벗고 누워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그녀의 쉰 목소리가 티비 소리에 섞여 어색한 방안의 공기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모든 일을 마음먹은 대로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타협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상황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발명한 모든 것들 중에 그나마 쓸 만한 것이라는 것임을 인정하는 편이다.
"글쎄요, 솔직히 약간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에요. 가능하다면 다른 여자를 보내주시거나 그냥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최대한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로 얘기하려 노력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며 자연스럽게 보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요구 따위는 그냥 허공에 띄워버리고선 내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마치 묵묵히 철을 제련하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처럼 우직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재빠르게 내 바지를 벗기고서는 벌써 내 그 곳에 손을 갖다 대고 있는 것이다.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마. 난 괜찮아."
나는 그녀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인지 나에게 타이르듯이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강한 거부감과는 상관없이 내 페니스는 부풀어 오르고 있었고 나는 어쩐지 절벽 위에서 내 하반신이 뛰어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내 마음이 편안해져버렸다. 차라리 내 페니스와 그 것을 잡고 흔들고 있는 저 손이 한 몸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가 내 몸 위에 올라와 일부러 내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점점 내 정신에서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방안을 가득채운 두 남녀의 정사가 이토록 아련하게 느껴지다니. '어쩌면 나는 정신적 불구일지도 몰라, 평생 이렇게 역 앞에 찾아와 섹스를 하고나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하는 거지 영원히.' 라고 생각했다.
사정이 끝나자 그녀는 바로 옷을 입지 않고 내 옆에 누웠다. 그리고는 침대 옆에 벗어놓은 그녀의 검은색 점퍼를 뒤적여 마일드세븐 담배를 꺼내 내게 권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나란히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어쩐지 우리가 오래된 연인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충직하게 그녀의 욕구를 채워주는 젊은 정부라던가.
"똑같지?" 그녀가 담배를 끄며 말했다. 그리고는 방안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하나씩 입기 시작했다.
"지나고 나면 다 똑같아. 네가 예쁜 아가씨랑 연애했다고 해서 지금 뭐가 다를 것 같아? 기껏해야 어떤 여자랑 잤는데 무지 예뻤다 그래서 좋았다 그 정도야. 누구 거는 금테 발라놓고 누구 거는 똥 발라져있나? 그렇다고 해도 뭐 다른 거있어? 넣고 싸고 그걸로 끝이지."
나는 어느 샌가 그녀가 반말조로 말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티셔츠에 프린트된 그림처럼 침대에 꼭 붙어 누워 그저 담배만 피워댔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옷을 다 입고는 들어왔을 때처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다음 잘있어라는 인사를 하고서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올라탄 전철 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어둠속에서 불빛들이 춤을 추며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때 그 점멸하는 꽃잎들의 낙화를 보면서 내 안에 있던 그 무엇들이 엉터리로 뭉쳐 이제는 도저히 무엇인지 알 수없는 부드러운 진흙탕처럼 돼버렸다는 걸 느꼈다. 그 무엇도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없다. 다만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전철의 달리는 소리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만이 내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우리가 설사 어제의 흔적들을 다시금 만나게 될지라도 그 것은 다만 현재로서만 존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저 나는 지금 집에 돌아가 푹 자는 게 최고일거란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