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우리는 지금 어느 조용한 거리에 들어서 있다. 해는 머리 위에서 욕심 사납게 날름거리고 사람도 드문 하다. 피할 곳 없이 떨어지는 햇살 속에서 빌딩들만이 벌 받는 것처럼 우뚝이 서 있다. 목덜미에서 땀방울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당신은 매미소리라도 들려왔으면 좋겠다고 말해본다. 그렇다, 우리는 지독히도 따분한 어느 여름 오후의 거리로 나온 것이다. 날씨는 덥고 할 일도 없다.
우리는 이탈리아계 바리스타가 하루 세 번 직접 커피를 로스팅하는 뉴욕 센트럴파크 바로 옆 14번 에비뉴와 9번 스트리트 코너 커피숍 ‘커피&커피’의 느낌적인 느낌을 추구한다고 알려진 인천광역시 부평구 문화의 거리에 위치한 어느 커피숍에 들어가기로 한다.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삭은 담배냄새에 한 번, 카페 안에 울려 퍼지는 음악과 환상의 불협화음을 그려내고 있는 대형 선풍기의 왱왱 거리는 소리에 다시 한 번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주인아저씨조차 힘 풀린 동공으로 마치 손님처럼 무관심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지옥처럼 텁텁한 공간이다. 차라리 맥주라도 퍼마실까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우리들의 머릿속에 피어오른다. 그러나 우리는 곧 운 좋게도,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화장실 바로 옆 구석 소파에 앉아 소곤거리는 저 J군과 B양을 발견하게 된다. 검은색 MLB 야구 모자에 큼지막한 영문 프린트가 새겨진 흰 티를 걸친, 약간 말라 보이는 J군과 그보다 더 마르고 체구가 아담한 하늘빛 원피스 속의 귀여운 B양을. 쪄 죽을 날씨에도 저렇게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비벼대는 걸 보니 둘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임이 틀림없다. 또 가만히 듣자하니 지난 주말에 처음으로 단 둘만의 여행을 갔다 온 모양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몹시 흥미로워질 수밖에 없다. 날씨는 덥고 할 일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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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싫은데?” 입가에 자신감 어린 미소를 안고서 J군이 B양쪽으로 고개를 돌려 묻는다.
“그냥. 싫어.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B양은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J군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대답한다.
“확실히 이유를 말해봐. 그냥 정말 궁금해서 그래, 응?”
“갑자기 또 왜 그래. 꼭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좀 그렇잖아. 그냥 이렇게 둘이 같이만 있어도 좋잖아.”
“근데?”
“아니 그냥, 그렇다고. 우리가 꼭, 응?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지금 그냥 이렇게 같이 커피숍에 앉아 있는 것도 좋아, 나는. 넌 안 그래?” 갑자기 용기를 얻은 듯이 B양이 J군의 눈을 쳐다본 채 묻는다. J군은 짧고 높은 웃음을 내뱉으며 잠시 커피 잔을 입에 대었다 떼어 낸다.
“나도 좋아. 근데, 너무 좀 그렇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너와 내가 사랑을 나누는 게 너무 좀 그런, 이상한거야? 너는 나랑 그러는 거 싫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좀 만날 때마다 그러면. 우리 여행 다녀온 뒤로 오늘까지 세 번째 만나는 건데 매번 그랬잖아. 너무 좀 동물 같아. 꼭 그러려고 만나는 건 아닌 거 알고 있지만 좀 그래서 그래.”
“동물 같다고?”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지만 J군의 목소리가 커진다.
“아니, 그게 아니라.” B양은 다시 고개를 J군 쪽으로 돌리지만 이번에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난 우리가 처음 사랑을 나눴을 때의 그 몸짓, 손길, 냄새 하나하나까지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해. 마치 머릿속에 누군가가 사진들을 하나 둘씩 걸어주는 느낌이었어. 아름다웠어, 정말. 너도 알지. 사랑하는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 너와 나, 우리 둘, 뭐 그런 느낌. 사랑하니까 사랑을 나누는 거야. 어떤 욕정뿐인 그런 것, 동물 뭐 이런 거랑은 완전히 다른 거지. 맞다, 너 포르노그래피와 에로티시즘의 차이가 뭔지 알아? 그건 어떤 감정이냐는 거야. 사랑이 있으면 아름다워지는 거야.”
B양의 얼굴에서 조금씩 어두운 기색이 피어오른다.
“그래도, 모텔 같은데 가는 거 싫단 말이야. 사람들이 볼까봐 무섭고. 거기 가는 건 딱 자러가는 거잖아. 그러려고 그런 데 가는 그런 느낌이 싫단 말이야. 그냥 좀만 참았다가 나중에 멀리 여행가자 응? 펜션 같은 데 예약해서.”
“너 지난번 외박도 진짜 겨우겨우 한 거잖아.”
“그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저녁 늦게 돌아오면 되잖아. 응?”
“아, 글쎄다. 그건 좀 그런데.”
J군이 한숨을 깊게 내쉬고 오른 쪽 검지를 세워 커피 잔의 테두리에 묻은 커피 자국을 천천히 훔친다. 그리고는 비장한 눈빛을 띈 채 심각하고 사려 깊은 목소리로 깊은 침묵을 갈라 나가기 시작한다.
“있잖아, 내가 모텔 방문이 우리 뒤로 찰칵 소리를 내며 잠길 때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아, 이제 세상에 우리 둘 뿐이구나. 늘 나는 너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온 세상에 우리 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원하는데 실제로는 그럴 수가 없잖아? 근데 그 공간에서는, 그 작은 방에서는 정말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느낌인거야. 누구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는 너와 나만이 살아가는 다른 세계라고나 할까. 나는 정말로 우리가 사람들 말만 따라 단순히 자기 위해서 그 모텔이라는 곳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사실은 너와 나를 위한 완전한 자유를 얻는 거라고. 그리고 그 건 아름다운 게 아닐까? 비록 고작해야 몇 시간, 또 몇 평도 되지 않는 것이지만 온전히 두 사람만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곳, 완벽하게 안전하고 격리된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곳에서 우리는 아름다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모텔은 어쩌면 전화도 오지 않고, 누가 혹 초인종을 눌러 방해할 걱정도 없고, 또 뭐야, 사랑도 나눌 수 있는. 이 게 중요하긴 하지 하하. 그런 자유를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아주 아름답고 고마운 공간이 아닐까 하는 거야. 그리고 뭐야, 월풀 욕조도 있지, 인테리어 깔끔하지, 티비도 크지. 뭐 시켜먹을 수도 있지. 맞다. 음료수도 공짜잖아? 응? 하하.”
J는 멋쩍은 웃음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어두웠던 B양의 얼굴에도 역시 싱거운 웃음이 피어오른다.
“근데, 그렇게 나랑 자는 게 좋아?
“응”
“왜?”
“글쎄, 너 피부가 너무 맛있어서?”
“그게 뭐야, 진짜.”
“아무튼, 일단 나가자. 여기 너무 덥고 분위기가 좀 칙칙해.”
J가 B양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며 가방을 챙기기 시작한다. B양은 콤팩트파우더를 꺼내어 얼굴을 확인한 뒤 J군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방심한 채 앉아있던 우리들을 지나치면서 그들은 아찔한 열기 속으로 걸어 나간다.
글쎄,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할 일도 없고 너무 더운, 지독히도 따분한 어느 여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