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시 모음> 최원정의 '하지(夏至)' 외
+ 하지(夏至)
장맛비 잠시 멈춘
하늘 사이로
자귀나무 붉은
꽃등을 켰다
주먹만 한 하지감자
뽀얀 분 나게 찌고
아껴 두었던 묵은지
꺼내는 순간
어디선가 들리는
매미의 첫 울음소리
놋요강도 깨질듯 쟁쟁하다
(최원정·시인, 1958-)
+ 夏至하지
창문을 열고 집어낸다
무릎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만큼 덜어지는
나의 죄
바늘강 같은 매미울음 속으로
떠가는구나
시름없이 육체를 벗어나는
내 혼의 실오라기
어제의 바람이
어제의 하늘이
하지감자알로 굵었는데.
(김수우·시인, 부산 출생)
+ 하지夏至
밤이라고 하기엔 밖이 너무 밝고
낮이라고 하기엔
저녁 시간이 꽤나 깊어있다
백야白夜같은 하지夏至
낮이 가장 길다함은
밤이 가장 짧다는 말
하루의 주어진 같은 시간
시계는 멈추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건만
태양은 저 혼자 밤을 즐기려는 듯
가던 길을 멈추고
태연히 지구촌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홀로 따갑게 미소 짓는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밤은 짧고 짧은데…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하지
어머니 눈물져 떠나온 고향집에선
이 여름도
봉숭아가 주머니를 부풀립니다.
간장 항아리 놓였던 자리에
잡초 무성한 마당귀 우물가에
화르르, 화르르
석류처럼 꼬투리를 터뜨립니다.
인적 끊긴 집 둘레로
고추잠자리만 비행할 뿐,
먼지 낀 헛간에는 녹스는 농기구들.
허물어진 돌담을 끼고
해바라기만 줄지어 서 있고
그 무표정한 그늘을 딛고
토실토실 물이 오른 봉숭아 몇 그루,
듬성듬성 버짐이 핀 기와집 처마 밑에
해마다 둥지 트는 제비와 놀며
흰색 분홍색으로
여름을 부지런히 피워올립니다.
그런 날,
어머님 손톱에도
문득 바알간 꽃물이 돕니다.
(임동윤·시인, 1948-)
+ 낮에게
양력 6월 22일
오늘은 하지(夏至)
일년 중
네가 제일 긴 날.
동짓날부터 살금살금
발돋움하더니
마침내 너의 키 방금
최고조에 달하였네.
그 동안
참 많이 애썼구나
정상을 밟았으니
이제 내려와야 하겠지만
다시 키가 짧아짐을
슬퍼하지 말렴.
너를 대신하여 차츰
길어질 밤의 그림자 속에서
지금껏 쌓인 피로
말끔히 씻으렴.
내년 이맘때
기쁘게 재회할 것을
우리 새끼손가락 걸어
굳게 약속하자.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