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시 모음> 함민복의 '성선설' 외
+ 성선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배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시인, 1962-)
+ 손가락 한마디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 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한하운·문둥병자 시인, 1919-1975)
+ 네 번째 손가락
네 번째 손가락은
쓰일 곳이 없어
무명지(無名指)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한약 달여
저어 준 손가락으로
약지(藥指)라고도 하지요.
그리고
그대의 네 번째 손가락은
내가 준 반지가 있어
사랑지입니다.
그대의 심장에
나의 사랑을 전달하는
사랑지입니다.
(고종만·시인, 전남 구례 출생)
+ 손가락 총
아이가 내게 장난감 총을 겨누며
탕탕, 쏘더니
넘어져 죽으라 하네
너 이놈, 너 이놈
그대로 앉아 있으니
아앙, 우네
마지못해 죽은 듯 잠시 누웠다가 일어서면
아이는 내 죽음 따윈 관심도 없고
어느새 밖으로 뛰어 나가네
잠시 눈감고 엎드렸다 일어나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렇게 장난처럼 죽기도 하겠다고
이제는 내가 나를 향해
손가락 총을 탕탕 쏘네
그리곤 넙죽 엎드려서 손가락 총을
반질반질 빛나게 닦네
목숨처럼,
아니 이제도 내가 늘 찾는 명분처럼
빛나게 닦네
(김영천·시인, 1948-)
+ 창호지 문을 보면 손가락으로 찌르고 싶다
창호지 문을 보면 손가락으로 찌르고 싶다
찔러
잡히지 않는 것들 끌어내고 싶다
(유년시절 내성적인 나는 한번도 창호지를 뚫어본 적이 없다
늦여름 어머니가 발라놓은 창호지문을 바늘구멍도 내본 적이 없다)
항상 나를 막아서던 저 창호지문
난 자꾸 찔러대고 싶다
찔러
뚫어버리고 싶다
투명하지 않는 것들 선명하지 않는 것들
손가락을 찔러대고 싶다
깊숙이 찔러
관통해서라도 가슴끼리 만나고 싶다
(요즘은 모양만 창호지다
비닐인 창호지 문을 손가락으로 찌를 수 없다)
그대 마음 찔러댈 수 없다
(송정아·시인, 1960-)
+ 손깍지
세상 살아가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아
이따금 근심을 품고
잠 못 이루는 날에도
슬그머니 당신의 손을
내 가슴으로 끌어당겨
당신의 손가락 마디 사이로
나의 손가락 마디를 끼어
동그랗게
손깍지 하나 만들어지면
참 신기하기도 하지!
내 맘속 세상 근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늑한 평화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