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컵 떠놓고서 양파를 키우다가
컵 바닥에 파랗게 자라는 물때를 발견했다
저렇게 맑은 물 속에도 때가 숨어 있었을까.
고인 물은 썩는다고 누가 말했었지
물은 썩으면서도 양파를 키워 내고
물때를 가라앉히며 때를 버리고 물이 된다.
물 속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어난다고?
바다는 출렁이면서 제 몸을 씻어내고
세상의 때를 지우고 고기들을 풀어놓는다.
흐르는 물 속에도 이끼가 자라는 것을 보았다
가라앉은 낙엽들이 물고기의 집이 되어
한세상 흐르다가도 물이 흐려지는 이유.
(전정희·시인, 1957-)
+ 물의 유전자
우물천장이 있는 집, 물결무늬 선명한 우물마루가 있다
옹이가 있는 자리마다
바람이 휘돌아나가고
흔들림이 없는 자리에는 그대 마음의 파문이 인다
깃털 달린 씨앗이었을 때부터
우물을 꿈꾸던 나무, 솔방울 굴리며
송홧가루 날리며
제 속에서 출렁거리는 물길을 어쩌지 못하고
몸속에 저수지를 들여놓고
물의 흔들림을 새겨놓았다
홀로 있는 사람들이 적막을 키우는 동안
내려놓은 그림자보다 더 깊게 뿌리를 뻗어서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별을 심고
심어놓은 별들이 몸을 불리려고 달빛을 끌어당기는 사이
별을 심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덕 하나씩 들고 별을 따러 떠났다
우물이 되고 싶었던 나무,
제 속에 지어놓은 물길을 오래된 집에 풀어놓았다
우물마루에 앉으면 양수에 들어간 듯
몸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푸른 우물이 출렁거리고
우물천장에서는 별이 쏟아진다
나무의 몸을 타고 흐르는 물길이
오래된 집 우물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민흘림기둥을 타고 올라가서 우물천장을 흘러 돌아
다시, 그대의 몸 속으로 흐른다
목단꽃 피는 봄날 오후였다
우물마루에 앉은 한 사람의 그림자가 깊었다
몸 속 우물이 출렁거리는지
느티나무의 푸른 지느러미가 많이 흔들렸다
(김경성·시인, 전북 고창 출생)
+ 물의 소요(逍遙)
공복의 아침,
지난밤 독주에 혹사당한 장을 달래기 위해
한 컵의 생수를 마신다
쪼르륵 내장으로 스며드는 시원한 냉수의 맛
수 억만 개의 물의 분자들이 혈관을 타고
이윽고 체내에 침투해 들어가리라.
한때는 바다에 머물었다가
한때는 구름 속 떠돌이었다가
한때는 소나기 방울이었다가
한때는 수목의 혈관을 흐르다가
한때는 짐승의 내장을 적시다가
한때는 새의 분비물에 섞였다가
어쩌다 지하 깊숙이 스며들어
천만리 수맥으로 수 천 년 흐르다가
어느 날 문득 붙들려 지상에 끌려나온 너
플라스틱 병 속에 감금되어 참 멀리도 달려왔구나
이 아침 너와의 만남 참 묘연도 하다
그러나 내일이면 또 내 몸을 빠져나가
다시 얼마나 긴 무량 세월을
무궁 세상과 뭇 중생들의 몸속을 떠돌며
보시행을 멈추지 않을 것인가
참 아득도 하구나 그대의 길이여!
(임보·시인, 1940-)
+ 물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산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여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 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생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외로운 섬 하나 키우고 싶다
그 후 햇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문득 그대 잠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임영조·시인, 1943-)
+ 물맛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
(장석남·시인, 1965-)
+ 조용한 물 - 권영진 선생께
선생님.
저는 사납고 강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거칠은 폭력이나
세상을 일순간에 정지시키는
전쟁을 좋아했습니다.
거대한 배를 가라앉히는
폭풍이나 해일을 좋아했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은 이렇게 끝이 없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저에게
밥과 빵과 휴식과 안락을 주었습니다.
아. 그러나 혁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요.
화염병이, 달콤한 선동이
저 엄청난 폭풍이. 위대한 정치가가
세상을 부활시키는 것은 아니지요.
전쟁이, 태풍이,
화산의 용암이 휩쓸고 간 세상을
파랗게 물들이는 것은 조용한 물이지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조용한 물들이
밥과 빵과 휴식과 안락을 주지요.
어리석은 우리들에게....
(원구식·시인, 1956-)
+ 물
나보다 더 낮게, 언제나 나보다 더 낮게 물이 있다.
언제나 나는 눈을 내리깔아야 물을 본다.
땅바닥처럼, 땅바닥의 한 부분처럼, 땅바닥의 변형처럼.
물은 희고 반짝이며, 형태 없고 신선하며,
수동적이라 못 버리는 한 가지 아집이라면 그것은 중력.
그 아집 못 버려 온갖 비상수단 다 쓰니 감아돌고 꿰뚫고 잠식하고 침투한다.
그 내면에서도 그 아집은 또한 작용하여 물은 끊임없이 무너지고,
순간순간 제 형상을 버리고, 오직 바라는 것은 저자세,
오체 투지의 수도사들처럼 시체가 다 되어 땅바닥에 배를 깔고 넙죽 엎드린다.
언제나 더 낮게, 이것이 물의 좌우명. "향상"(向上)의 반대.
(프랑시스 퐁주·프랑스 시인, 1899-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