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시모음> 복효근의 '꽃 아닌 것 없다' 외 + 꽃 아닌 것 없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픔이 아닌 꽃은 없다 그러니 꽃이 아닌 슬픔은 없다 눈물 닦고 보라 꽃 아닌 것은 없다 (복효근·시인, 1962-) + 꽃들은 꽃들은, 꽃들은, 피는 걸 감추지 못 하나봐 인간과 달라 감추는 짓을 하지 못 하나봐 (조정권·시인, 1949-) + 자석 꽃들은 자석인가 봐요 나를 끌어당겨요 꽃에게 끌리는 것 보면 나는 꽃과 다른 극인가 봐요 고운 빛깔 만져 보고 향긋한 향기 맡다 보면 나도 조금은 꽃과 같은 극이 되는지 꽃 떠날 때 마음이 밝아져요 (함민복·시인, 1962-) + 꽃마음 꽃에도 마음이 있는 것 아시나요 속 시린 이들에게 건네줄 솔솔한 향내 살점 한 잎 꽃에도 마음이 있는 것 아시나요 (이찬의·시인) + 꽃이 필 때 지나온 어느 순간인들 꽃이 아닌 적이 있으랴 어리석도다 내 눈이여 삶의 굽이굽이 오지게 흐드러진 꽃들을 단 한번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니 (송기원·시인, 1947-) + 꽃만 말하지 말 것 꽃이 피는 것은 뿌리와 잎이 시간을 견딘 보람 그래서 꽃을 말할 때는 뿌리와 잎도 같이 말할 것 사람을 말할 때도 뿌리와 잎을 같이 말할 것 (공광규·시인, 1960-) + 아, 입이 없는 것들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시인, 1952-) + 파꽃 피었다 파가 자라는 이유는 속을 피우기 위해서다 파가 튼실할수록 하얀 파꽃 둥글수록 파는 속을 잘 비워낸 것이다 다 자란 파는 속이 없다 사람들은 파 속을 먹지 않는다 (이문재·시인, 1959-) + 꽃도 서럽구나 꽃도 그늘이 있고 상처가 있구나 꽃도 눈물이 있고 해야 할 말이 있구나 꽃도 시들면 떨어지는구나 꽃도 날마다 더 서러워지는구나 꽃은 아름다움만 뽐내는 줄 알았는데 꽃은 즐겁게 흔들리며 향기만 내는 줄 알았는데 꽃은 나비랑 벌이랑 놀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꽃은 해만 바라보아 그늘이 없는 줄 알았는데 꽃도 사람 같구나 사람도 꽃 같구나 그래서 서로 보며 부러워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꽃이 피면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 (정용철·시인) + 꽃이 지는 까닭 피고 지는 일이 어찌 네 탓이랴 꽃잎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가만히 귀를 대고 등을 내어주고 있다 눈을 감아도 뜨겁게 이름을 부르며 웃고 서 있더니 초록잎을 환하게 남겨두고 짧은 날에 슬픔으로 맺힌 까닭은 사랑이 사랑을 지키지 못하여 꽃이 지는가 (박소향·시인) + 꽃그늘 애써 둘러보지 않아도 보이는 건 봄꽃들만 무성하여서 그 화사함에 난 그만 깜빡 죽어버리고 싶었어. 어느 얼빠진 시인이 봄꽃에 저 홀로 취해서 함부로 지껄여댄 것처럼 그늘진 곳 하나 없는 꽃빛깔로 이 세상에 진정 봄이 온 줄 알았지. 헌데, 눈깔을 까뒤집고 살펴보자니 꽃이란 묘한 것이어서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그 꽃자리에 꽃 피운 만큼 한 다발 그늘도 만들고 있어. 무시무시한, 꽃그늘을 만들고 있어. (정세훈·시인, 1955-) + 꽃은, 사랑하니까 핍니다 꽃은 서릿발이나 칼바람 속에서도 불길 같은 땡볕 아래서도 사랑하니까 피어납니다 그대를 바라만 봐도 내 안에 웬 꽃송이들 설레며 피어올라 어쩌면 나도 꽃이려니 생각했습니다 불면의 이슥한 밤 이 하늘 아래 어디선가 잠들어 있을 그대를 생각하다 내 안에서 언뜻언뜻 향기가 나서 진정 나도 꽃이구나 느꼈습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대 보이지 않고 길모퉁이를 쓸쓸히 돌아가던 그대 뒷모습이 눈에 밟혀올 때 어느 들길 어느 바닷가에 나 홀로 앉았을 때 가슴에서 눈물처럼 떨어지는 낙화를 보며 내가 왜 꽃인지를 알았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꽃입니다 꽃은, 사랑하니까 핍니다 (양전형·시인, 제주도 출생) + 꽃들은 경계를 넘어간다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세상은 아주 작은 것들로 시작한다고 부신 햇빛 아래 소리 없이 핀 작디작은 풀꽃들, 녹두알만 한 제 생명들을 불꽃처럼 꿰어 달고 하늘에 빗금 그으며 당당히 서서 흔들리네요 여린 내면이 있다고 차고 맑은 슬픔이 있다고 마음에 환청처럼 들려주어요 날이 흐리고 눈비 내리면 졸졸졸 그 푸른 심줄 터져 흐르는 소리 꽃잎들이 그만 우수수 떨어져요 눈물같이 연기같이 사람들처럼 땅에 떨어져 누워요 꽃 진 자리엔 벌써 시간이 와서 애벌레처럼 와글거려요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무슨 경계를 넘어가나요 무슨 이름으로 묻히나요 (노향림·시인, 1942-) + 꽃을 두고 사람들은 꽃을 두고 때에 따라 곱다고 한다. 밉다고 한다. 나비들은 꽃이 고운 줄 모른다 미운 줄도 모른다 그저 꽃 자체를 좋아하고 따를 뿐이다 꿀벌들도 꽃이 고운 줄 모른다 미운 줄도 모른다 그저 꽃이 피면 꽃을 떠나지 못할 뿐이다. 꽃들은 사람들로부터 곱다 밉다 험담을 들어도 늘 그대 눈빛 속에 피어 있다가 그대 마음에 열매로 남는다 (김창영·조선족시인) + 꽃 내 손길이 닿기 전에 꽃대가 흔들리고 잎을 피운다 그것이 원통하다 내 입김도 없이 사방으로 이슬을 부르고 향기를 피워내는구나 그것이 분하다 아무래도 억울한 것은 네 남은 꽃송이 다 피워내도록 들려줄 노래 하나 내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가슴을 치는 것은 너와 나란히 꽃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 내 손길마다 네가 시든다는 것이다 나는 위험한 물건이다 돌이나 치워주고 햇살이나 틔워주마 사랑하는 이여 (백무산·시인, 1955-) + 꽃들에게 배우다 그저 자기만의 색깔과 모양으로 무언(無言)으로 말한다 벌, 나비의 미세한 몸짓에도 파르르 떨며 무한의 교감(交感)을 한다 햇살과 달빛과 별빛 이슬과 서리 보슬비와 소낙비 천둥과 번개.... 가냘픈 몸에 모두 품어 생명을 짓는다 한철을 살다 가면서도 깃털처럼 가볍게 미련 두지 않고 총총 떠난다 꽃들은 세상의 모든 꽃들은!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