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시 모음> 김윤현의 '땅' 외 + 땅 쓰레기와 몸을 섞으면서 지렁이와 함께 뒹굴면서 썩은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시체와 오래도록 누워있으면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그대 땅땅거리지 않아서 기분 좋다 그대 하늘처럼 높다 (김윤현·시인, 1955-) + 순결한 땅 이 땅의 절반은 매국노의 후손 것이고 그 나머지 반 토막은 권력자들 몫이다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내가 누울 땅 한 뙈기 (김영철·시인, 1961-) + 언 땅 제 마음 어쩌지 못하고 가둬두었을 때 이렇게 꽁꽁 얼어붙는구나 (한상숙·시인) +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젖을 물고 있는 어머니의 품속, 바람에 날린 씨앗이 떨어진 자리, 그 생명이 움트는 자리, 개망초꽃 핀 자리, 낙엽이 뒹군 자리, 풀벌레 울던 자리 내 사랑이 앉았다 돌아간 자리, 다시 돌아와 기다리는 자리 이 같은 아름다운 자리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자리. (김상현·시인, 1947-) + 땅바닥 시화전 대학로 귀퉁이 아스팔트 바닥에 학생들이 그려 붙여 놓은 땅바닥 시화전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아 무심히 밟고 지나치지만 하느님 눈에는 잘 보여 허 그 녀석들 참 감탄하시며 내려다보시는 땅바닥 시화전. (나태주·시인, 1945-) + 땅의 혁명을 급합니다 호흡이 점점 가빠옵니다 중환자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 땅을 숨통을 터주어야 합니다 땅의 혁명을 해야 합니다 아아 땅의 혁명을 (이선관·시인, 1942-) + 땅의 폭동 봄이 되어 아무리 깊이갈이를 해도 땅이 그 전처럼 말을 안 듣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땅의 형편을 살피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소출을 늘여보겠다고 비료와 농약을 지난해보다도 더 많이 퍼붓는다 지렁이도 땅강아지도 온갖 미생물도 모조리 사라지고 빈 농약병들만 을씨년스럽게 굴러다니는 땅은 숨을 쉴 수가 없다 땅은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그들의 유린과 무계획과 마구잡이에도 지쳤다 땅은 이대로 죽기가 싫다 방법은 단 하나 욕망과 우둔에 정면으로 맞서는 길뿐 땅이 펼치는 무서운 폭동의 조짐에도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저 인간들에게 오염과 굶주림의 미래가 오리라 그들에겐 더 이상 풍성한 가을이 없으리라 (이동순·시인, 1950-) + 땅 일어서고 싶다 누워 살아도 빈 가슴 채우고 싶다 움직이는 것들의 몸부림을 바라보면 주름진 들판 팔다리 쭉 펴서 함께일 수 없는 우리 높낮이 함께이고 싶다. 발굽을 옮길 적마다 나에게 고통받는 그대 엎드려 땀으로 일구면 일렁이며 넘치는 지평선으로 막힘 없이 불어오는 양달진 바람 거짓 없는 그대 가슴에 안겨 뒹굴고 싶다 우리 모두 함께이고 싶다. (윤수진·시인, 1964-) + 아버지의 땅 이른 새벽 풀잎에 맺힌 이슬 바짓가랑이 적시며 둘러보던 논둑길 아버지는 이 길을 수천 수만 번 다니셨지요 어깨에 긴 자루 삽 하나 메고서 오늘은 아버지 대신 내가 이 길을 걷습니다 아버지 발자국을 따라서 아버지의 땅에 아침해가 떠오릅니다 따스한 햇볕을 받아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논둑길 저만치서 아버지 당신이 웃고 계십니다. (이문조·시인) + 이 땅의 날씨 이 땅의 날씨는 단군 할아버지 때부터 쑥과 마늘을 먹었기에 쓰고 매울 수밖에. 산을 뭉개서 밭을 치고 밭을 갈아 고랑을 트며 거기다 고추를 심고 메밀을 심었기로, 우리는 뻘뻘 매운탕과 훌훌 냉면을 날마다 즐겼다. 가을날 초등학교마다 운동회를 벌이면 사람마다 기를 들고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꼬마들도 땅뺏기 하면 불끈 주먹을 내밀거나 활짝 손을 펴면서 그렇게 뺏고 빼앗겼다. (허세욱·시인, 1934-) + 땅을 위한 진혼곡 땅이여, 아직 죽은 것은 아니지만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그대에게 평화 있어라. 여기 한 노래가 있다. 그대와 나의 장례를 위하여 내 가슴속에 휘갈겨 쓴 노래. 독성이 서린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내일 그대의 몸은 차갑고 무감각하게 되리니, 그때에는 아무것도 이 땅에 남지 않으리라. 나 또한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리라. 그리하여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혹은 그대의 잿빛 얼굴에 한 방울 눈물을 떨구기 위하여, 막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그대, 땅을 위하여 내 이 노래를 휘갈겨 쓰노라. 그대는 수없이 많은 비사교적인 자녀들을 낳았지. 그대는 그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며 남몰래 슬픔의 눈물을 흘렸지.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그대를 잡아먹기 시작했지. 그러나 그대, 모든 것을 참아내는 그대는 아무런 저항이나 방해의 몸짓도 하지 않았지. 그대의 품안에서 젖을 빨며 포동포동 살이 오른 그들은 새로운 갈증을 느꼈지. 그대의 신성한 가슴의 피를 빨아먹고픈 그들의 마지막 갈증을. 그들은 태양이 사랑하는 신부에게 입혀 준 녹색 옷을 그대에게서 벗겨버렸지. 그대의 여린 살 속으로 그들은 날카로운 손톱자국을 새기고, 그대의 상처에서 용솟음치는 피를 빨아먹었지. 그대 자신의 자녀의 죄와 수치라는 무거운 짐 아래, 약탈당하고 추방당하고 머리가 벗겨지고 등이 굽은 그대. 이제 그대는 우주 속에서 홀로 방황하노라. 땅이여, 아직은 죽지 않았지만 막 숨이 넘어가고 있는 땅이여, 그대에게 평화 있어라. (작자 미상, 정연복 역)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