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묵상 시 모음> 성찬경의 '한일자' 외 + 한일자 마음먹고 붓에 먹물을 듬뿍 먹여 한일자 하나 써본다. 삐뚤빼뚤 굵었다 가늘었다 심지어 불결하기 짝이 없는 터럭까지 매달려 있다. 이것 큰일났구나. 바로 내 마음 내 모습 아닌가. 세상에 태어나 한일자 하나 제대로 못 쓰고 만대서야 되겠는가. 나는 요새 남몰래 한일자 쓰는 연습을 한다. 사람이 아무리 연습해도 완벽한 한일자는 못쓴다. 완벽한 한일자에 무한히 접근할 따름이다. 단 한 획, 가장 간명한 꼴 따지고 보면 인생은 한일자다. 흠없는 한일자 하나 남기고 가면 빼어난 인생이다. (성찬경·시인, 1930-) +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시인, 1942-) + 눈물 인생이란 기쁨과 슬픔이 짜아올린 집, 그 안에 삶이 있다. 굳이 피하지 말라. 슬픔을 … 묵은 때를 씻기 위하여 걸레에 물기가 필요하듯 정신을 말갛게 닦기 위해선 눈물이 있어야 하는 법, 마른 걸레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늘은 모처럼 방을 비우고 걸레로 구석구석 닦는다. 내일은 우리들의 축일(祝日) 아닌가. (오세영·시인, 1942-) + 인생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산의 모습을 모며 창 밖 오동나뭇잎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 이 가을에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가을밤, 텅 빈 넓은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며 인생을 되돌아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바람이 불고 감잎이 마당에 뒹구는 소리에 잠자리를 뒤척이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그렇게 뒤척이며 지샌 아침, 산은 어제보다 더욱 붉고 곱다. 가을은 가을은 그렇게 깊어가면서 사람들과 함께 만산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다 (김용택·시인, 1948-) + 인생이 별거더냐 살아보니 별 거 없더라 웃으니 울 일이 생기고 잘 나가니 바닥으로 내려가더라 건강이 병들기도 하고 사랑이 미움으로 돌아서고 눈을 뜨면 눈을 감는 자도 있더라 자랑이 수치가 되고 음지가 양지가 되기도 하고 잘나면 못난 자가 있으며 욕심은 죄업이라 만고에 탐욕 만한 고통도 없더라 비운다 비운다 나이 들어 결심해도 비움이 어디 쉬운 일이냐만 인생은 양면의 얼굴로 오르락내리락하더라 살아보니 별 거 없더라 무덤자리 출렁이는 신작로에 흘러온 인생이 공수표로 뒹굴고 촛농처럼 굳은 넋에 상처만 무수한 별들이 떴다가 지는데 무성한 생의 바람 앞에 머쓱하고 부끄러움만 가득하더라 (고은영·시인, 1956-) + 인생 고기나 잡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 년 열 두 달 비린내나 쫓는 인생. 너무 하잘 것 없는 인생 아니냐고 소주잔 기울이며 쓴웃음 짓는 영감님, 다른 인생인들 별건 줄 아십니까? 방망이 두드리는 사람 지폐 헤아리는 사람 피고름 짜내는 사람 고분 속 뼈다귀 꿰 맞추는 사람 가마에 불지피는 사람 ------. 모두들 같은 짓거리 되풀이하긴 마찬가지 아닙니까? 같은 짓 되풀이하다 되돌아가긴 마찬가지 아닙니까? 영감님 앞엔 후박나무 잎새 수런거리는 싱싱한 바다 밥상처럼 차려져 있지 않습니까? 머리를 긁적이는 영감님, 영감님 얼굴에 핀 산다화가 곱습니다. (손광세·시인, 1945-) + 빈손으로 왔다가 가는 길에 옥토의 밭에서 태어나지 못했다고 자갈밭의 서러움 슬퍼하지 마십시오 찢어지는 가난 대물림하며 이름 없는 들꽃처럼 살았더라도 한탄의 신음소리 내뱉지 마십시오 파도치는 바다에서 등대의 불빛 같은 한 사람 만나 사랑의 길 걸었다면 행복한 삶입니다 물질, 명예의 꽃 화려하게 피었어도 한순간 꺾어지는 향기 없는 꽃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 들고 가는 길에 영원한 사랑의 꽃 가슴에 피웠다면 그대, 행복한 사람입니다 (손희락·평론가 시인, 대구 출생) + 기울어짐에 대하여 한 친구에게 세상 살맛이 없다고 했더니 사는 일이 채우고 비우기 아니냐며 조금만 기울어져 살아보란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노처녀로만 지내던 그 친구도 폭탄주를 마시고 한 남자 어깨 위로 기울어져 얼마 전 남편을 만들었고 내가 두 아이 엄마된 사실도 어느 한때 뻣뻣하던 내 몸이 남편에게 슬쩍 기울어져 생긴 일이다 보들레르도 꽃을 삐딱하게 바라봐 악의 꽃으로 세계적인 시인이 되었고 피사탑도 10도 정도 기울어져 명물이다 노인들의 등뼈도 조금씩 기울어지며 지갑을 열듯 자신을 비워간다 시도 안 되고 돈도 안 되고 연애도 안 되는 날에는 소주 한 병 마시고 그 도수만큼만 슬쩍 기울어져 볼 일이다. (문숙·시인, 경남 하동 출생) + 지나치지 않음에 대하여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지나치지 않음을 생각한다. 아침 신문도 우울했다. 지나친 속력과 지나친 욕심과 지나친 신념을 바라보며 우울한 아침, 한 잔의 차는 지나치지 않음을 생각케한다. 손바닥 그득히 전해오는 지나치지 않은 찻잔의 온기 가까이 다가가야 맡을 수 있는 향기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지나친 세상의 어지러움을 끓여 차 한 잔을 마시며 탁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세상의 빛깔과 어디 한 군데도 모나지 않은 세상살이의 맛을 생각한다. (박상천·시인, 1955-) + 아픈 역사 뇌졸중 환자가 된 지 어언 3년에 들어섰다 일 년이 지나니 친척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2년이 지나니 친구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이제 가끔 찾아오는 한두 사람 제자들에 힘입어 오늘도 지팡이 짚고 산책길에 나선다 이것이 인생인 것을 고희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김원중·시인, 1936-) + 꽃처럼 살려고 꽃피기 어려운 계절에 쉽게 피는 동백꽃이 나보고 쉽게 살라 하네 내가 쉽게 사는 길은 쉽게 벌어서 쉽게 먹는 일 어찌하여 동백은 저런 절벽에 뿌리 박고도 쉽게 먹고 쉽게 웃는가 저 웃음에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쉽게 살려고 시를 썼는데 시도 어렵고 살기도 어렵네 동백은 무슨 재미로 저런 절벽에서 웃고 사는가 시를 배우지 말고 동백을 배울 일인데' 이런 산조(散調)를 써놓고 이젠 죽음이나 쉬웠으면 한다 (이생진·시인, 1929-) + 인생이란 계단 인생은 연극이라 했다. 산다는 게 힘들다고 삶이 버겁다고 중도에 막이 내려지는 연극은 아무 의미가 없다. 햇볕이 있어야 초록 나무를 볼 수 있고 잔잔히 불어 주는 바람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소박한 꿈을 가질 수 있는 게 바로 인생이라 생각한다. 나 자신만 사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고 욕심을 부리지 말고 주어진 일에 성실함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때론 내가 하는 일에 싫증을 느낄 때도 있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우리는 쉽게 버릴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생각을 바꿔보면 내가 좋아서 하는 일 또는 내게 맞는 일을 하고 있다면 모든 일에 당당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별한 삶과 행복한 인생이 따로 있겠는가? 일어나 하늘을 보라. 저 넓고 푸른 하늘은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명심하라. 누구든지 삶에 대하여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없으니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여겨 보라. 포기하는 삶을 살지 말고 절대 좌절치 말고 한 번 더 일어나 걸어간다면 예전에 큰 물건이 아닐지라도 작은 꿈 상자로 만족할 수 있는 인생이란 계단을 웃으며 오를 수 있을 것이다 . (안성란·시인) + 나의 노래 눈부신 태양은 못 되어도 좋으리 세상의 어느 모퉁이 이름 없는 나무가 되어 고단한 길손 잠시 쉬었다 가는 작고 편안한 그늘 하나 드리우면 좋으리 청춘의 날은 가고 뜨거운 사랑의 시절도 가고 이제 얼마쯤 남은 나의 생은 손톱 자라듯 그렇게 조금씩만 깊어지기를....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