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 시 모음> 존 던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외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누구든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가면 우리 땅은 그만큼 작아지며,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領地)가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손상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조종(弔鐘)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존 던·영국 형이상학파 시인, 1572-1636) + 밥알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이재무·시인, 1958-) + 기둥과 언덕 만원 전철 안에서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서 있을 수 없다 내 옆사람 또 옆사람들이 기둥이 되어 줄 때 나도 하나의 기둥으로 설 수 있다 어찌 전철 안에서뿐이랴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내 이웃 또 이웃들이 보이지 않는 언덕이 되어 줄 때 나도 하나의 언덕으로 설 수 있다 (윤수천·시인, 1942-) + 너 없음으로 너 없음으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음으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오세영·시인, 1942-) + 너 내가 '그' 앞에 서면 그는 '네'가 되고 내가 '너'를 떠나면 너는 다시 '그'가 된다 너는 내가 가는 곳마다 태어나서 내가 떠날 때마다 죽는다 아, 무지개처럼 드러났다 노을처럼 스러지는 아름다운 너 2인칭, 너는 순간의 꽃 슬픈 환상이다 (임보·시인, 1940-) + 어깨동무 태풍이 지나간 들 주저앉아 버린 벼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대여섯 포기를 함께 모아 지푸라기로 묶어 주니 혼자서는 일어서지 못하던 벼들이 서로를 의지해 일어서는 들판 쓰러졌다 일어나 서로들 얼싸안다가 어깨동무하고 다시 길을 가는 듯한 벼들을 바라보니 나도 누군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길을 가본 지가 참 오랜 일인 것 같습니다 (김인호·시인, 1959-) + 지팡이와 할머니 -소모도에서 소모도 언덕길을 올라가는 검은 지팡이와 하얀 할머니 지팡이는 할머니를 만난 지 3년 됐고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80년을 지내다가 지팡이를 만난 후부터는 지팡이 없이 하루도 지내지 못한다 할머니는 나를 보느라 지팡이를 세워놨는데 지팡이는 나를 보지 않는다 할머니는 나를 보겠다고 허리를 펴는데 지팡이만큼 펴지지 않는다 지팡이는 허리를 굽히지 못하고 할머니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지팡이는 할머니 없이 걷지 못하고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걷지 못하고 이렇게 못하는 것끼리 만나 못하는 일 없이 사는구나 (이생진·시인, 1929-) + 홀로 무엇을 하리 이 세상에 저 홀로 자랑스러운 거 무어 있으리 이 세상에 저 홀로 반짝이는 거 무어 있으리 흔들리는 풀잎 하나 저 홀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서있는 돌멩이 하나 저 홀로 서있는 게 아니다 멀리 있는 그대여 행여 그대 홀로 이 세상에 서있다고 생각하거든 행여 그대 홀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우리 함께 어린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자 밥그릇 속의 밥알 하나 저 홀로 우리의 양식이 될 수 없고 사랑하는 대상도 없이 저 홀로 아름다운 사람 있을 수 없듯 그대의 꿈이 뿌리 뻗은 이 세상에 저 홀로 반짝이며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나니. (홍관희·시인, 1959-) +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개꽃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개꽃 뒤에 뒷짐을 지고 선 미루나무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들판에 사는 풀이며 메뚜기며 장수하늘소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 말을 옮겼다 반짝이는 창유리에게, 창유리에 뺨을 부비는 햇빛에게 햇빛 속의 따뜻한 손에게도 말을 옮겼다 집도 절도 차도, 젓가락도 숟가락도, 구름도 비도 저마다 이웃을 찾아 말을 옮겼다 새들은 하늘로 솟아올라 그 하늘에게, 물고기들은 물밑으로 가라앉아 그 바닥에 엎드려 잠자는 모래에게, 아침노을은 저녁노을에게, 바다는 강에게 산은 골짜기에게 귀신들은 돌멩이에게 그 말을 새겼다 빨강은 파랑에게 보라는 노랑에게, 슬픔은 기쁨에게 도화지는 연필에게, 우리집 예쁜 요크샤테리어종 콩지는 접싯물에게, 태어남은 죽음에게 그리고 나는 너에게. (박제천·시인, 1945-) + 내가 살고 갈 이 세상에 아침상을 앞에 놓고 내다보면 호숫가 수양버들 아래 재두루미 한 마리가 그림처럼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내가 아침을 마치고 커피를 마실 때 그도 송사리로 아침을 때우고 호수 건너편으로 날아간다 그가 나타나지 않는 날은 그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어떤 날은 잡은 고기가 너무 커서 내장만 쪼아먹다 떠난다 나는 이것을 주어서 거름이라도 되라고 꽃나무 밑에 묻어준다 밤중에 너구리가 와서 땅을 파고 훔쳐가 버리기도 한다 살과 피가 되는 것 더 잘 된 일이 아닌가 한 시대를 함께 살고 간다는 친밀감 나를 외롭지 않게 살고 가게 해 주는 이 모든 것들 더 없이 고마워지고 있다 (이창윤·시인, 경북 대구 출생) + 덮어준다는 것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 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였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로 말해질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겠다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다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 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복효근·시인, 1962-) + 나에게 기대올 때 하루의 끝을 향해 가는 이 늦은 시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다 보면 옆에 앉은 한 고단한 사람 졸면서 나에게 기댈 듯 다가오다가 다시 몸을 추스르고, 몸을 추스르고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올 때 되돌아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흔들림 수십 번 제 목이 꺾여야 하는 온몸이 와르르 무너져야 하는 잠든 네가 나에게 온전히 기대올 때 기대어 잠시 깊은 잠을 잘 때 끝을 향하는 오늘 이 하루의 시간, 내가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한 나무가 한 나무에 기대어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어 나 아닌 것 거쳐 나인 것으로 가는, 이 덜컹거림 무너질 내가 너를 가만히 버텨줄 때, 순간, 옆구리가 담장처럼 결려올 때 (고영민·시인, 1968-) + 지구를 둘러싸고 둥근 춤을 이 세상 모든 소녀들이 서로 손을 잡는다면 바다를 전부 둘러싸고 둥근 춤을 출 수 있을 텐데 이 세상 모든 소년들이 뱃사람이 된다면 그들의 배로 파도 위에 멋진 다리를 놓을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지구를 둘러싸고 둥근 춤을 출 수 있을 텐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는다면 (폴 포르·프랑스 시인, 1872-1960) + 우리는 나뭇잎에게 물었다 우리는 나뭇잎에게 물었다 "당신은 혼자서 살 수 있나요?" 나뭇잎은 대답했다 "아니오, 내 삶은 가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가지에게 물었고 가지는 대답했다 "아니오, 내 삶은 뿌리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뿌리에게 물었고 그것은 대답했다 "아니오, 내 삶은 줄기와 가지와 잎들에 달려있습니다. 가지에서 잎들을 떼버리면 나는 죽을 것입니다." 거대한 나무의 생명은 그렇다. 아무것도 완전하게 혼자서만 살 수 없다. (해리 에머슨 포스딕·미국 성직자) + 그들이 처음 왔을 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아무도 항의해줄 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독일 목사이며 신학자, 1892-198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