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시모음> 김종삼의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외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시인, 1921-1984) + 시인론(詩人論) 한 소년이 시인은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아름다운 노래 만들며 살아가는 제법 멋있는 사람이라고 일러주었다. 한 청년이 또 시인은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과학자가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는 그런 것까지 보고 가는 눈이 깊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한 장년이 그런 질문을 또 하기에 가난하게 살지만 세상을 여유 있게 하는 다정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갔다. 한 노인이 멈춰 서서 소매를 붙들고 또 그렇게 물었다, '정말 시인은 무엇하는 놈들이냐'고 '죽음을 너무 일찍 깨우친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놈'이라고 그의 막힌 귀에 대고 악을 썼다 (임보·시인, 1940-) + 시인 새벽부터 자판을 두드렸다 가갸거겨고교구규 낯익은 글자들이 눈앞을 어른거렸지만 한 줄 쓰지 못하고 한나절이 훌떡 하나님은 구름 한 점을 둥실 띄워 놓으셨다 (곽경석·시인, 1959-) + 시인(詩人) 이미지와 이미지. 그 사이에서 출렁이더니만 파도의 하얀 칼 하나 뽑아든 시인(詩人) (전병준·문학평론가 시인) + 눈꽃 시인 시방 그걸 글이라고 쓰는 거니 봐라 어둠 속에서 써내려간 글이지만 하나 흐트러짐 없이 눈길 닿는 곳마다 순박하게 쓰여진 하얀 언어들을 알겠니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진정한 시인은 자연 그 자체라는 것을 (박우복·시인) + 시인 시를 청탁하는 전화가 왔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링거병을 달아준 것같이 가슴이 마구 뛰놀았다. 시침을 떼고, 고료부터 물었다. 죽은 나무가 꽃이라도 피울 기세로! 아직 살아 있다는 듯이! 한때 시를 쓴 적이 있었지만, 곧바로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 후로 몇 년간 청탁을 물리치는 게 진통제가 필요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나저나, 십칠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인들은 무대포로 살고 있군. 아니, 고료가 한 푼도 안 올랐다니 나는 십칠 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현역이었군. (장정일·시인, 1962-) + 시인은 한 눈을 가리고 세상을 간다. 하나만 가지라고 구술 두 개를 보이던 사람에겐 옥돌 빛만 칭찬하고 돌아서 왔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이련다 남루(襤褸)를 감고 거리에 서서 마음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라 (이한직·시인, 1921-1976) + 신기한 세상이라고 창문을 열고 첫눈을 보듯 그렇게 보아야 한다 이 세상 처음 보는 사람처럼 신기하게 세상을 보아야 한다 어차피 시인은 보고 사는 사람 그 사람도 처음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반겨야 한다 웃음소리 처음 듣는 사람처럼 그렇게 기뻐해야 한다 울음소리 처음 듣는 사람처럼 그렇게 슬퍼해야 한다 꽃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말이다 새를 처음 보듯 말이다 강물을 처음 보듯 말이다 사랑을 처음 할 때처럼 말이다 어차피 시인은 보고 흐느끼다 가는 사람 아닌가 (이생진·시인, 1929-) + 베스트셀러 시인 '나무의 수사학'을 펴낸 손택수 시인이 한국시인협회가 주는 젊은 시인상을 받을 때 밝힌 수상 소감이다. 시집이 나오고 일주일 동안 책이 하도 잘 나가서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는 꿈을 꾸었단다. 알고 보니 그것은 순전히 가짜였다고, 어머니가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 한 권 한 권 사다가 쌀독 속에 쌓아 두었던 것. 가끔 노친네 친구들에게 팔기도 했다는데 시집 외상, 5000원 시집 외상, 8000원 어머니 글씨가 선명했고 시인이 시인 자신의 시집을 사는 것 같아 얼굴을 화끈 붉혔다 한다. 그 뒤 한 달을 기다렸다가 서점에 들러 보니 딱 한 권 팔렸다고. 그 말을 들은 시인은 처음엔 실망했지만 그 한 권을 사간 사람은 혹시 시인일지 모른다고 그 한 권을 산 독자를 위해 계속 쓰겠노라 했다. 시인은 시밖에 몰라서 늘 목말라해도 투명한 영혼의 젖줄은 계속 풀어내야 한다고. 독자 한 사람의 가슴을 울리기 위해 쓰는 오, 진정한 베스트셀러 시인. (노향림·시인, 1942-) + 시인이란 것들 밤중에 홀랑 꾀벗고 마누라와 그것을 하다가 열렬하게 하다가 문득 사상이라는 것이 떠올랐다나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달려가 그것을 수첩에 적어놨더니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그저 미지근하니까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린다." (김남주·시인, 1946-1994) + 시인이 된다는 것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 왜냐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어린애처럼 작은 곱셈 구구단 속에서 영원히 머뭇거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시인이 된다는 것은 항상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밀란 쿤데라·체코 소설가, 192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