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를 만난건 3학년때, 원래 우리 학교 자체가 군대를 늦게 가는 풍조가 만연했기 때문에 나 역시도 3학년때 까지 군대를 안가고 있었다.
아니,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하늘이 나를 군대 못가게 만든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빽도 뭣도 없는 나는 3학년이 끝나고 나서는 어쩔수 없이 군대를 가야 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늘이 도왔을까. 걸으면 발바닥이 조금씩 아파서 재검신청을 했는데 평발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그래서 현역이 아닌 4급 공익으로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학교를 다니고, 나는 공익 근무처와 집을 오가면서 우리의 사랑을 지속시켜 나갈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제대를 하게 되었고, 우리는 똑같은 4학년으로 학교를 함께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기념일이라는건 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생일, 결혼 기념일, 100일 , 200일 , 300일.. 사람들은 이 날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날처럼 생각하며 그 기념일과 관련된 사람과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나와 그녀의 기념일은 별로 그렇지 못했다.
내가 주 5일간 저녁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기념일을 멋지게 챙겨줄만한 넉넉한 돈이 나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호프집 저녁 아르바이트 하나 하는 것으로는 내 등록금과 생활비를 빠듯이 맞출 수 있었뿐, 돈을 모아서 뭔가를 해 본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특히 내가 군대를 가면서는 호프집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게 되었기 때문에, 돈은 더욱 쪼달리게 되어 기념일이 다가와도 그녀에게 반듯한 선물 하나 해줄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만난지 1000일이 다가오던 날. 나는 결심을 했다.
비록 지금까지의 100단위 기념일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었지만, 이번 1000일 만은 정말로 성대하게, 그리고 멋진 기념일 선물을 준비해 주겠다고......
하지만 그동안 변변치 않은 선물만 계속 해 왔고, 또 그녀가 지금 무슨 선물을 가장 받고 싶어 하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며칠간을 무슨 선물을 해야 할까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가장 친하면서 나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은 같은 학교 여 후배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이 후배역시 그녀와 같은 소위 말하는 상류 계층의 딸이었는데, 그 후배는 나와 그녀가 사귀는걸 1학년때부터 못마땅하게 여겨왔었다.
하지만 그 후배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녀가 지금 무엇을 가장 갖고싶어하는지 알 길이 없어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수업을 들으러 가는 그 후배를 붙잡고 약간 더듬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혹시.. 성미가 요즘 같이 다니면서, 가장 갖고 싶어했던 눈치를 보이던 물건이 있었나요?'
(그렇다 그녀의 이름은 성미다. 김성미.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녀는 나를 한번 획 쳐다보더니, 꼭 길가는 똥개 본 마냥 다시 눈을 앞으로 휙 돌렸다.
그리곤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저...저기.......'
내가 다시 그녀를 제지하자.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다시 휙 뒤를 돌아보며 쏘아대듯이 말했다.
'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귀금속점에 가면, 카키색 사파이어가 예쁘게둘러진 70만원 상당의 은반지가 있어요.
전에 같이 거기 쇼핑갔다가, 성미가 그걸 갖고 싶어하는 눈치더라구요.
그럼 이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그 말만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눈앞이 깜깜해 지는 것을 느꼈다.
70만원이라...
내 두달 생활비 하구도 자그만치 10만원이 남는 돈이다.
한달에 10 만원도 저축 못하는 내가 어디서 70만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한다는 말인가.
정말로 그당시에는 깝깝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70만원짜리 반지는 시간이 지나도 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에 잘려구 이불에 누워두, 머리 속에는 온통 반지 생각 뿐이었다.
' 여자친구가 갖고싶은거 하나 선물해 주지 못하는 병신같은놈...'
배고 있던 베개로 뒤통수를 감싸며 돌아누었다.
하지만, 반지는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으면서 계속 나를 괴롭혔다.
그때가 965일째였으니까, 딱 35일 남은 시점이었다.
수중에 있는 돈은 고작 10만원, 반지를 사기위해 뭔가를 하려면 그때 시작해야 되는 타이밍이었다.
' 그래 좋아.. 한번 죽어보자.. 내 목숨 바쳐 까짓거 반지 하나 사주지 뭐..'
어려운 결심을 했기 때문일까, 그날 저녁 나는 한숨도 못자고 밤잠을 설쳐야 했다.
다음날 아침, 난 학교 가기에 앞서 집앞에 있는 생활정보지들을 한부씩 전부 뽑아들었다.
그리고 강의실에 들어가서 교수님이 앞에서 수업하시는데도 불구하구 맨 뒷자리에 앉아 할 만한 아르바이트에 빨간줄을 그었다.
이런 나를 그녀는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오빠.. 왜 그래?? 뭐 돈빌려서 안 갚은거 있어?? 웬 아르바이트를 찾어??'
'아.. 다른 친구 녀석이 아르바이트 자리 찾아달라구 부탁해서..그거 찾아주는거야..하하'
'핏..... 싱겁기는..'
난 그녀에게 이 사실에 대해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리구 아르바이트 역시 그녀가 모르는 시간대에 있는 것을 골라서, 내가 반지를 선물할때까지 그녀가 절대로 내가 반지를 선물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로 다짐했다.
왜냐.. 그래야 그 선물이 더욱 값지고 감동적인 것이 되는 거니까....
그때 내가 찾은 아르바이트는 저녁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근무하는 노래방 알바와, 아침 4시30분부터 6시30분까지 근무하는 신문배달 알바였다.
한달근무하면 나오는 비용이 앞에것이 35만, 뒤에것이 30만... 5만원 모자란건 내 생활비를 좀 아껴써서 마련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 그래.. 한번 해 보자~!!!'
아마도 그때 한달이.. 아버지 돌아가시구 나서 어머니, 큰형과 함께 조그만 사글세 방 하나에서 살아야 되었던 때 이후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원래 호프집 아르바이트가 9시에 끝나니까,
나에게 있어서 쉴 시간은 9시부터 10시까지 1시간과 새벽 2시부터 4시30분까지의 2시간30분밖에 없었다.
조금이나마 잠을 자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노래방 의자에서 새우잠을 잔 후 일어나 신문배달하러 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못 잔 잠을 대부분 학교 수업시간에 보충을 했는데, 수업시간에 엎어져 자는 것으론 피로를 푸는데 한계가 있었다.
15일 정도 지나니까, 아침에 세수를 하고 나면 코에서 새빨간 피가 주르륵 한 그릇 정도씩 매일 흘러 나왔다.
그리고 얼굴 역시 피를 흘린만큼 초췌해져만 갔다.
이렇게 까지 고생을 해서 그깟 반지 하나 선물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학교에서 그녀의 귀여운 눈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나태한 생각이 싹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이런 나의 변화를 못 알아차릴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아르바이트 한지 20일이 되던날, 얼굴을 잔뜩 찌뿌리고 나의 손을 잡아끌고 학생회관 휴게실로 향했다.
' 오빠 솔직히 말해.. 요새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얼굴에 핏기가 없어??'
' 아..아무일도 아니야.. 요새 저녁에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만 그러네~~하하하'
그당시 제대하구 나서, 공부를 시작한건 사실이다.
그녀와 같은 계층의 사람이 되기 위한 일종의 발악으로, 나는 제대하구나서 얼마후부터 사법고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만 시작했지 아직 법전 한권 제대로 공부한 역사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 모르게 모든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었으므로, 그녀에겐 이걸 핑계삼아 거짓말을 한거다.
' 법 공부가 여간 어렵니.. 그래서 보구 또보구 보구 또보구 하면서 날 새다 보니 이렇게 되었나 보네.하하하..'
난 멋적은 웃음을 웃었지만, 아마도 그게 쓴 웃음으로 보였을까.
아님 그녀가 나의 이런 바보같은 짓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 큰 눈망울에 조금씩 조금씩..
눈물이 고이며 울먹이면서 나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