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십니까?
사랑이 올 때는 소리가 없다는 것을.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가슴에 들어와 앉 게 된다는 것을.
가랑비에 속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 로 오는 듯 오지 않는 듯 대지를 적셔주기에 사람들이 흔히 아무런 대책 을 세우지 않았다가 낭패를 보곤 하지요.
사랑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모르게 다가와 어느 순간 눈을 떠보면 이미 마음마저 흥건히 적셔져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 고 맙니다.
차라리 소낙비처럼 강렬하게 쏟아진다면 그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할 수도 있었으련만, 사랑은 대부분 가랑비처럼 슬그머니 다가와서 대책 없이 당하기 일쑤입니다. 문제는, 갈 때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조용조용 간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들리게 마련 이고, 올 때와는 달리 너무나 큰 흔적을 남겨두고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 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 어떤 장면보다 더 기억에 남듯 우리의 이 별 장면도 사랑하며 지내왔던 그 어떤 기억들보다 더 그 사람의 가슴에 머문다는 것을.
눈이 내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눈도 얼마든지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던 그날, 나는 길을 걷다 우연히 그녀와 마주 쳤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팔짱을 낀 채 아주 행복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길 모퉁이에 서서 하염없이 그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그녀를 향해 가만히 손을 흔들었습니다.
나는 이 제 그만 그녀를 놓아주기로 작정했던 것이지요.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그녀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그녀를 위해 그 녀를 내 마음속으로부터 떠나보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지요. 가끔 그때의 장면이 떠오르면 나는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녀를 내가 진정으로 좋아했다면 왜 용기 있게 다가서지 못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어 서였습니다.
그녀를 위한다는 구실로 내 용기 없음을 감추려고 했던 비 겁함…. 그래서 그 장면은 내게 영원히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 행동이 아주 옳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좁은 새장으로야 어디 새를 사랑 할 수 있겠습니까.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내 안에서 날 수 있도록 내 자신이 점점 더 넓어지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임을 그때 나는 참으로 가슴 아프게 깨달았던 것이고, 그리하 여 나는 조금 더 성숙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때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보내 는 자의 것이지 결코 떠나는 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꽃이 떨어져도 열매는 남아 있듯 그 사랑은 온전히 떠나보내는 자의 것이라는 것을.
그 리하여 아파할 가슴이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일 인지도. 그리하여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당신의 가슴 에 큰 앙금을 남기고 떠날지라도 사랑이 그대에게 손짓한다면 조용히 맞 이하라고.
-이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