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사상의 신화, 무너지다.
남들이의 딸은 끝내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 동안 남들이 하는 일만 한다는 남들이 사상으로 살아오며 한 번도 실패를 맛본 적이 없던 남들이는 남들이 좀처럼 겪지 않는 그 일을 겪고는 미쳐 버렸다. 결국 남들이 사상도 지구상에 나타난 그 수많은 사상들처럼 기어이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남들이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숙씨가 남들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는 점이었다.
나와 현준은 남들이가 입원해 있는 정신병원으로 찾아갔다. 병원마당에 있는 벤치에 정숙씨와 환자 옷을 입을 남들이가 앉아 있었다. 우린 그 곳으로 걸어갔다. 정숙씨는 우리를 보더니 인사를 했다.
“건이는 좀 어때요?”
내가 물었다.
“사람을 몰라봐요.”
나는 가슴이 아팠다. 정숙씨한테 뭐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현준이가 말했다. “남들이, 넌 그래도 행복한 줄 알아? 남들이 이렇게 이쁘고 마음씨 아름다운 여자를 부인으로 얻는 건 쉬운일이 아니니까. 멀리 갈 것 없이 정찬이만 봐도 알잖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영어라고 생각하는 바보같은 영어선생하고 살잖아?”
나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현준이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소라? 우리 소라가 어디갔지? 우리 소라 못 봤어요?”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던 남들이가 불안한 눈으로 우리를 보며 말했다.
“여보, 이제 정신 차려요. 소라는 죽었다고요.”
“당신 누구야? 누군데 우리 소라가 죽었다고 하는 거야? 당신같은 인간은 죽어야 돼.”
남들이는 정숙씨의 목을 졸랐다. 나와 남들이는 깜짝 놀랐다.
나는 정숙씨한테서 남들이를 떼어 놓으려고 남들이한테 달려들었고 현준이는 의사를 부르러 갔다. 미쳐버린 남들이의 힘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젖먹던 힘까지 겨우 다 짜내고 나서야 남들이를 정숙씨한테서 겨우 떼어 놓을 수가 있었다.
“괜찮아요?”
내가 정숙씨를 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정숙씨는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발작을 한 남들이는 여전히 흥분하고 있었다. 그 때 현준이가 의사와 간호사를 데리고 왔다. 의사는 발작하고 있는 남들이한테 진정제 주사를 놓았다. 남들이가 조금 진정이 되자 의사와 간호사는 남들이를 병실로 옮겼다. 남들이는 병실 안에 있는 바비 인형을 보고는 ‘우리 소라 잘 있었어? 아빠가 맛있는 거 사 왔어?’ 하고 말했다. 현준은 그런 남들이를 슬픈 눈으로 보다가 말했다.
“남들이란 말은 이제 한 번도 하지 않는 군. 그 말을 한 번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말이야. 사실 멍청한 말이긴 했어도 그래도 정감은 있었거든.”
우린 정숙씨한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왔다. 병원을 나와 걷는 내내 나는 가슴이 아팠다. 한심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허곤날 남들이란 말을 되풀이 하던 그 때가 훨씬 나았다. 나는 남들이가 어서 빨리 정신을 차려 남들이가 남들이란 말을 다시 꺼내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집으로 돌아와 밤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나는 남들이 생각 때문에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남들이가 다시 예전의 그 모습을 찾는 것은 나의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안 좋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한 말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나는 답답함에 이불을 걷고 일어나서는 담배를 꺼내 담배를 피웠다.
“담배 필려면 나가서 피어. 담배가 애한테 얼마나 안 좋은 줄 알아?”
다른 때 같았으면 그 말에 대꾸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때문에 저기압이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방을 나왔다. 담배를 몇 까치 피고 나서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다.
“무슨 걱정 있어?”
채신은 내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그제서야 알아채고 물었다.
“남들이 말이야. 너무 안 됐더라고. 예전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었어.”
“자식을 먼저 보냈으니 오죽하겠어? 영어를 배워도 조금도 늘지 않는 한심한 인간이긴 했어도 딸은 끔직히 사랑했잖아? 그러니 상심이 컷겠지.”
나는 황당한 얼굴을 하며 채신이를 보았다. 채신은 남들이 보고 한심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남들이보다 몇 배나 더 한심한 인간이다.
“정말 자식을 먼저 보내면 그렇게 상심이 큰 걸까? 우리도 자식 먼저 보내면 남들이처럼 될까?”
채신이 베게를 나를 향해 강속구로 던졌다. 어렸을 때 동네 오빠들하고 야구를 했었는지 베게는 정통으로 내 얼굴에 맞았다. 남편한테 베게나 던지는 채신한테 화가 났지만 착한 사람은 여자를 때리는 게 아니란다는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 참기로 했다. 게다가 채신은 임신한 여자다. 임신한 여자랑 싸우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넌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 그 따위야? 임신한 부인 앞에서 할 말이 따로 있지? 그런 막말이나 하고 말이야. 우리 애가 죽긴 왜 죽어. 니가 그러고도 아버지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어? 두 번 다시 그 딴 소리 해 봐라. 그럼 당장 이혼이니까.”
‘이혼하면 나야 좋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들갔다. 채신은 임신했고 이 상황에서 이혼하면 손해 보는 건 순전히 채신이다. 나는 혼자가 되는 것이고 채신은 애딸린 이혼녀가 되는 것이니까. 대한민국은 애 딸린 이혼녀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힘겨운 나라다. 그런데도 채신은 앞 뒤 파악 못하고 고집만 부리며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다. 그에 비해 나는 놀라운 현실 통찰력을 갖고 있다. 자기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침대에 올라가 채신의 옆에 누웠다.
“이번엔 내가 봐 주는 줄 알아. 다음에 또 그딴 소리 해 봐라. 정말 가만 안 둘테니까.”
“알았어.”
나는 채신이가 봐 준 것이 고맙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채신은 그것이 형식적인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말로 착각했다. 다시 한 번 채신은 너무나도 멍청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며 잠을 자기 위해 눈을 붙였다. 또 남들이 생각이 났다. 무너진 남들이 사상의 신화,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