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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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신이의 임신
TV에서는 이라크는 지금이란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부시가 자랑스럽게 종전을 선언한지 4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이라크는 그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상황으로 흐르고 있었다. 미국의 사상자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미국은 이제 이라크에서 발을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이라크 전쟁은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거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었다. 다큐멘터리가 끝나갈 무렵 영어밖에 모르는 멍청한 마누라 채신이 학원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채신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나한테 성을 내며 말했다.
“야, 니 친구 이 건 말이야. 담배 회사 다니는 인간.”
“남들이가 왜?”
“영어학원 다니는 것 좀 다시 생각해 보라고 그래? 도대체 영어학원을 왜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 매 수업시간마다 시간만 때우고 가게. 영어학원이 무슨 시간이나 때우는 장소인 줄 알아?”
“남들인 원래 그래. 걔가 영어학원을 다니는 이유는 남들이 영어학원을 다니기 때문이라고. 결코 영어를 잘 하고 싶어서가 아니야. 걘 남들이 하는 것만 하는 인간이거든.”
채신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남들이가 영어학원을 그만 다니게 하는 좋은 방법을 알려줄까?”
“뭔데?”
“니 수강생들한테 수강을 포기하라고 해 봐. 그럼 남들이도 수강을 포기할 거야. 남들이는 남들이 하는 것만 하는 인간이니까.”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우리 셋은 뭘 먹고 살아? 니가 받아오는 몇 푼 안 되는 월급으로 우리 셋이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아?”
“셋이라니? 우린 둘이야.”
“나 임신했어.”
“뭐?”
“무슨 반응이 그래? 축하한다는 말 정도는 해 줘야 되는 거 아냐?”
“축하? 암 축하해 줘야. Concratulation!"
나는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 애물단지인 애를 갖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영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언어라고 생각하는 대단한 영어선생인 채신은 나의 영어에 감격했다. 저런 바보가 낳는 아이라니? 갑자기 아이가 불쌍해졌다. 그 아이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멍청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는 운명에 처한 것인지. 아무래도 아이를 구해내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말이야. 근데 우리한테 아이는 좀 이른 거 같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넌 지금 아이를 지우자는 거야?”
“아니 꼭 지우자는 게 아니라 현명하게 생각을 해 보라는 거야. 솔직히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는데 우리가 애를 키우키는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다 영어를 못 하는 멍청한 나라에서 태어나서 그런 거야. 영어를 잘 하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육아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을텐데 말이야.”
정말 아이가 불쌍했다.
“하지만 그래도 난 아이를 낳을 거야. 난 둘 다 해 나갈 수 있다고. 물론 니가 도와줘야 해.”
채신의 마음을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실수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였는데... 채신이 한 말에 화가 나서 나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며 홧김에 채신이를 덮친 게 실수였다. 하지만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만들기 전까지는 지난 일은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채신은 TV 앞으로 걸어가더니 TV위에 있는 비디오에 비디오 테이프를 넣고 비디오를 틀었다. 예상했던 대로 자막 하나 나오지 않는 영국영화-미국영화인지도 모르지만 99%는 영국영화가 틀림없다.-였다.
“우리 아이는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보다 영어를 잘 하게 될 거야.”
“그렇겠지. 그리고 아마 엄마라는 말 보다는 마마라는 말을 더 먼저 깨우칠 거야.”
“그게 어때서?”
난 기가 막혔다. ‘여긴 영국이 아니라 한국이야’ 라고 소리쳐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침대로 가 누웠다. 저런 바보같은 여자가 엄마라니 정말 태어날 아이가 불쌍했다.
남들이 사상 위기에 처하다.
나는 진리가 무언지 모른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내가 한 가지 알고 있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은 결코 남들처럼만은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남들과는 다른 한 가지 일쯤은 겪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남들하는 것만 하고 산다는 남들이 사상으로 멋지게 살아오던 남들이한테도 결국은 남들은 좀처럼 겪지 않는 그런 일이 닥쳤다. 그 일이란 바로 이제 겨우 2살 밖에 안 된 남들이의 딸이 악성 림프종에 걸린 것이었다. 남들이는 며칠전에 의사한테 그 말을 듣고서는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나와 현준이가 같이 한 자리에서 남들이는 평소와는 달리 남들이 마시는 것 보다 훨씬 많이 술을 마셨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남들한테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 난 남들처럼 착하게 살아왔다고. 난 정말 억울해.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냐고?”
나는 정말 남들이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때 현준이가 또 기막힌 발언을 했다.
“공산주의 사상이 무너졌듯이 21세기 신사상 남들이 사상도 이렇게 무너지는 것인가? 안타까운 일이야. 난 니가 정말로 완벽한 사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때 같으면 현준이의 헛소리에 한 소리 할 남들이였다. 하지만 남들이는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기가 찬 얼굴로 현준이를 보다가 말했다.
“넌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
“농담 아냐. 난 정말 남들이 사상이 멋진 사상이라고 생각했어. 500원 주고 차를 샀잖아?”
나는 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현준이를 쳐다보다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비웠다.
“그나저나 사람은 착하게 살 필요가 있는 걸까? 난 아무리 봐도 그렇게 살 필요가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봐, 남들이는 남들처럼 착하게 살아왔는데 결국 딸이 악성 림프종에 걸렸잖아? 어쩜 말야.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복 받는다는 말에 세뇌 당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야.”
“그 헛소리 좀 그만 둘 수 없냐? 세뇌라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만두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너도 이미 세뇌 당한 것 같아. 역시 무서운 세상이라니까. 아, 맞아, 그런 글을 쓰는 건 어떨까? 우린 세뇌 당하고 있다는 글 말이야. 근데 무엇한테 세뇌 당하고 있다고 하지? 기계한테 세뇌 당하고 있다는 건 공상과학만화에서 너무 많이 써 먹어서 마음에 안 들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세뇌 당하고 있다는 것도 너무 많이 들어본 얘기인 거 같아 마음에 안 들고. 바퀴벌레는 어떨까?”
나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친구는 딸이 불치병에 걸려서 혼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인데 헛소리나 늘어놓다니 정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럼 개미는 어때? 아니 개미 보다는 거미가 나을 거 같은데. 아니, 아니야. 그것도 안 좋아. 아무래도 집에 가서 구상을 좀 해 봐야 겠어. 그래야 멋진 글이 나올테니까. 난 그만 갈게.”
현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들이 너무 걱정하지마. 내가 니 딸을 위해 기도도 해 주고 치료비도 마련해 줄 테니까.”
“치료비? 너 같은 백수가 돈이 어디 있다고 치료비를 마련해 준다고 그러냐? 병원비가 한 두푼인 줄 아냐?”
나는 목소리를 높여 비아냥 거렸다.
“내가 보기에 말야. 넌 정말 세뇌 당했어. 백수가 돈이 없다고 생각하다니 말이야. 백수는 일이 없는 사람이지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야. 이제야 나의 일급비밀을 밝히는 건데 솔직히 난 돈은 많아. 남들이 딸 치료비 대 줄 정도는 돈이 있다고.”
현준은 그렇게 또 허풍을 치고는 술집을 나갔다. 남들이는 그동안 나와 현준이의 대화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술만 마셨다. 그리고 술이 떨어지자 종업원한테 술을 한 병 더 주문했다. 내가 그만 마시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엄청 술을 마신 남들이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남들이를 집에다가 데려다 주었다. 정숙씨는 남들이가 술이 잔뜩 취해 정신을 잃은 채 내게 부축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세상이 꺼져 내릴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소라 때문에... 소라는 좀 어때요?”
“소라도 그렇지만 이 사람이 더 큰일이에요. 요즘 들어와서 계속 이러니. 고마워요.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세요.”
“아니에요. 늦었는데 그만 가 볼게요.”
나는 남들이의 집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정말 남들이가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누가 뭐래도 남들이는 나의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