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사상은 위대했다.
남들이가 내 결혼을 축하해 주려고 나와 친구들을 초대한 날이었다. 솔직히 축하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축하해 준다는데 안 가기도 뭣해서 채신이가 일하는 영어학원앞에서 채신이를 만나기로 했다. 그동안 안했던 남들이 얘기를 다시 하겠다. 남들이는 아직도 채신이한테 영어를 배운다. 하지만 남들이의 영어실력은 도통 진전이 없다. 그저께도 남들이를 만났는데 그 때 ‘영어는 많이 늘었냐?’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아니. 늘 리가 없는게 당연하잖아? 하고 말했다. 나는 너무나 당연한 그의 대답에 기막혀 하면서 물었다.
“그럼 굳이 학원 다닐 필요 없지 않냐? 괜히 돈만 낭비하는 짓인데.”
“그래도 영어학원은 다녀야 돼. 남들이 다니니까. 그리고 영어학원 다닌다고 영어를 잘 하게 되는 게 아니잖아? 영어학원 다녀서 영어를 터득하는 사람은 극소수야. 영어학원 다니는 사람이 다 영어를 터득했다면 우리나라가 진작에 영어강국이 되고도 남았을 거라고.”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리도 있어 보였다. 남들이의 말처럼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학원을 다닌다고 영어를 다 터득했다면 말 많고 탈 많은 영어공용화가 진작에 시행되었을 거라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나라보다 영어공부에 시간을 투자하면서도 영어실력은 세계 최하위나 다름없는 일본과 막상막하를 이루고 있다. 선생이 형편없는 것인지, 학생이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영어가 어려워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채신이가 파란눈의 외국인과 함께 학원을 나왔다. 파란눈의 외국인은 See you tomorrow 라고 말하고 떠나갔다.
채신이가 나한테로 왔다.
“가자.”
내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 차 가지고 올 테니까.”
“또 차 타고 가자고?”
나는 기막혀 하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그냥 버스타고 가자. 남들이네 집은 버스정류장에서 5분만 걸어가면 되니까. 니가 운전하는 차 타고 가면 버스보다 늦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승용차가 어떻게 버스보다 느릴 수가 있어? 난 버스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고.”
채신은 차를 가지러 갔다. 물론 채신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사실 차는 그런대로 잘 몰고 속도도 낼 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운전이라는 건 단순히 차를 모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운전에서 중요한 것은 길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채신은 길치이며 공간감각이라곤 전혀 없으며 지도도 볼 줄을 모른다. 그래서 30분이면 갈 길을 돌아서 한 시간 반에 간다. 가끔은 두 시간이나 걸릴 때도 있다.
10분이 지났는데도 채신이가 오지 않았다. 주차를 엉망으로 시켜놓아서 차 빼는데 애를 먹는 모양이었다. 가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에 주차를 시켜놨는지도 알 수 없었고, 설사 그걸 알아서 내가 간다해도 나는 운전을 할 줄 모르니 도와줄 수 없는 게 뻔했다.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20분이 더 지난 후에야 채신이가 차를 몰고 나타났다.
“타.”
‘버스타고 갔으면 벌써 반은 갔겠다.’ 하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채신을 사랑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며칠 앞두고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근데 그 미친 인간도 오는 거야?”
채신이 악셀레이터를 밟으며 말했다.
“누구?”
“누군 누구야? 지금 너랑 같이 살고 있는 그 백수 있잖아?”
“안 올 리가 없잖아?”
채신이 얼굴이 벌레를 씹은 듯이 찡그려졌다. 채신은 이 세상에서 현준이를 가장 싫어했다. 그녀가 현준이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 인간이 번번히 채신이를 속였기 때문이었다. 채신은 다음에는 안 속겠다고 굳은 다짐을 했지만 그런 다짐은 아무런 소용없이 현준이의 말도 되지 않는 말에 매번 속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자 속이는 것이 무슨 대단한 지상과제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현준이한테는 채신 또한 피할 수 없는 타겟이었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현준이가 하도 자신을 속이는 것에 화가 난 채신은 현준이를 데리고 경찰서로 갔다. 그리고는 경찰을 보더니 대뜸 말했다.
“이 인간이 날 속였어요. 이 인간을 처벌해 주세요.”
현준은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는 듯이 아주 당당하게 앉아 있었고,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채신이를 보았다. 사실 현준이가 밥먹듯이 채신이한테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그 거짓말은 하나같이 처벌대상이 되는 거짓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한테 얼마를 뜯겼죠?”
경찰은 사기사건이라고 짐작하며 그렇게 물었다.
“돈 뜯긴 건 없어요. 이 인간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글쎄, 갈매기살이 갈매기 고기라고 하잖아요? 난 깜쪽같이 속았다니까요. 갈매기살이 정말 갈매기 고기인 줄 알았다고요. 그러니까 이 인간을 처벌해 주세요.”
“예?”
경찰은 어처구니 없어 하다가 채신이를 보며 말했다.
“이 봐요, 아가씨. 경찰이 그렇게 우습게 보여? 경찰서에 와서 그런 말도 안되는 장난이나 하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나가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에요?”
채신은 경찰한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넌 뭐하고 있는 거야? 한 마디 말도 없이. 경찰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데 넌 분하지도 않아?”
나는 분하기는 커녕 창피해서 채신을 경찰서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갈매기가 영어로 뭐니?”
“sea gull.”
“그만 나가자. 영어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거든.”
“그래.”
나는 그렇게 해서 채신과 현준이를 데리고 경찰서를 나왔다. 현준은 누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떠났고 나는 채신과 함께 걸었다. 채신은 분에 하며 말했다.
“저러고도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니 도둑을 못 잡지. 한 달 전에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도 아직도 못 잡았다고.”
그 때 채신이네 집에 들었던 그 도둑은 아직도 못 잡았다. 세상에 완전범죄란 있다. 그리고 완전범죄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TV에서는 허곤날 완전범죄는 없다고 떠든다. 또 이야기가 잠깐 딴 데로 흘렀다. 다시 본 얘기로 돌아가겠다.
“근데 아까 영어에 대해 궁금한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채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응, 그게 말야...”
나는 머뭇거리며 뜸을 들였다. 사실 영어에 대해 궁금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겨우 진정시킨 채신이의 화가 다시 폭발할 것 같아 나는 고심끝에 궁여지책으로 또 갈매기에 대해 물었다.
“그게 뭐냐면 말야. 사실 갈매기도 여러 종이 있잖아? 그게 영어로 뭔지 궁금해서.”
“그건 말야. 검은 머리 갈매기는 Saunders's Gull, 괭이 갈매기는 Black-tailed Gull, 붉은 부리 갈매기는 Black-headed Gull, 세가락 갈매기는 Black-legged kittwak, 쇠제비 갈매기는 Little Tern...”
나는 갈매기에 대해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아서 건성으로 듣고 있었는데 내가 한글로도 잘 모르는 갈매기 종을 영어로까지 알고 있는 채신이한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채신이가 영어선생이긴 해도 솔직히 갈매기의 종과 그 종의 이름을 영어로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둑 갈매기는 Skua 또는 Jaeger 라고 해. 이제 알겠어? 잘 모르겠지? 내가 스펠링 적어줄게. 스펠링 적어주면 금방 알 수 있을테니까.”
그녀는 가방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더니 갈매기의 종을 영어로 적어서는 나한테 건네주었다.
“고마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걸 받았다. 그렇게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 바람에-하긴 세상일이란 원래 다 그런 거지만- 나는 알고 싶지도 않은 갈매기의 종을 영어로 알게 되었고, 채신이의 화를 가라앉힌 채 무사히 넘어갈 수가 있었다.
갈매기의 종을 영어로까지 꿰뚫고 있는 채신은 운전에는 젬병이다. 그녀는 지금 또 헤메고 있다. 내가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은 사람은 어떤 일이든 노력하면 노력한만큼 실력이 는다는 말이다. 내가 봐 온 바로는 사람이라는 게 천차만별이어서 어떤 사람은 어떤 일을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일에 조금의 진전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뭐, 멀리 갈 것 없이 내 옆에서 운전하고 있는 채신은 아무리 운전을 하고 다녀도 좀처럼 운전실력이 늘지 않는다. 그녀가 운전면허를 딴 지는 벌써 5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녀의 운전실력은 5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주차는 엉망이고 5년동안 운전을 하고 다녔으면 길을 알만도 한데 여전히 길을 모른채 뱅뱅 돌기만 한다. 가끔 그런 걸 생각할 때마다 ‘어쩜 그렇게 운전을 하고 다녔는데도 도무지 늘지 않을까?’ 하고 의아해 하다가도 내 생각을 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채신이가 이해된다. 나도 아무리 노력해도 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은 오락게임이다. 나는 비행기 오락을 3분 이상 넘긴 적이 없으며 테트리스는 5판 이상을 깬 적이 없고, 친구들과 이제는 게임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도 소위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다. 누구나 하나쯤은 잘하는 것이 있듯 누구나 못하는 것도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길을 제대로 가르쳐 줬다. 그러나 내가 말한 길로 차를 몰지 않은 채신은 빙빙 돌다가 겨우 남들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갔으면 이미 남들이네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채신은 여전히 또 주차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소비했고 그러고도 엉망으로 차를 주차시켰다. 나는 기가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채신이가 운전에 젬병이라는 건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우린 차에서 내려 남들이가 살고 있는 5동으로 들어갔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이 505호여서 우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505호 집앞에 도착한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조금 후 문이 열리고 정숙씨가 모습을 보였다.
“안 오는 줄 알았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정숙씨는 밝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내 동생 정연이의 바보 웃음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웃음이었다. 웃음에도 여러종류가 있다.
“차 타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예?”
정숙씨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나는 분명 사실대로 말한 것이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정숙씨의 반응을 보니 내가 한 말이 정말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사실이 거짓말보다 더 황당할 때가 있다.
“뭐가 늦었다는 거야? 그래도 걸어오는 것 보다는 빨리 왔잖아?”
채신이가 말했다. 물론 채신이의 말은 사실이다. 내가 채신한테서 마음에 드는 것은 딱 두 가지가 있는데 뭐, 하난 알거 같다고? 용모. 미안하지만 틀렸다. 물론 채신이가 이쁜 얼굴이긴 하지만 난 뜯어 고쳐 이뻐진 얼굴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답은 내가 지키고 있는 세가지에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과 거짓말은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채신은 우기기는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채신은 멍청한 여자이긴 해도 순진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가서 앉으세요.”
정숙씨는 거실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놓은 술과 음식들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자리엔 남들이, 현준이, 달타령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와 채신은 그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주방으로 갔던 정숙씨가 또 음식을 날라 가지고 왔다. 현준이가 내 귀에 대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직 성공을 못했어.”
“뭘?”
내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는 또 내 귀에 대고는 속삭였다.
“정숙씨를 속이지 못했다니까. 아무리 봐도 너무 이쁘단 말야. 오늘은 정말 작정하고 왔는데 아직 수련이 부족한가 봐.”
나는 뭐 이런 인간이 있나 하고 현준이를 쳐다보았다. 정숙씨가 수상한 현준이와 나의 행동을 보더니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에요? 재미있는 얘기면 둘이서만 하지 말고 우리한테도 좀 들려주세요.”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제수씨도 그만 음식 나르고 저희랑 같이 놀아요.”
현준이가 당황을 하며 말했다.
“야, 내 부인이 왜 니 제수냐? 형수지. 당신도 이제 그만하고 이리로 와요.”
“지금 하고 있는 음식만 내오고요.”
정숙씨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숙씨가 현준이의 제수든 형수든간에 현준이의 말대로 정숙씨는 엄청 이쁘다. 채신은 이뻐질려고 얼굴을 뜯어고쳐 이뻐지긴 했지만 타고난 천연미인인 정숙씨한테는 비교가 안 된다. 게다가 정숙씨는 똑똑하며 마음씨도 비단결처럼 곱다. 나는 이쁜 여자는 다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실제로 내가 만난 이쁜 여자들은 하나같이 다 멍청했다.- 정숙씨를 만나고는 그 생각이 바뀌었다. 이쁜 여자 중에서도 똑똑한 여자는 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쁜 여자는 멍청해야 한다. 아님 성질이 못 되어 먹었던가? 그래야 공평하지 않은가? 하지만 정숙씨는 이쁘고 똑똑한 여자다. 아니, 어쩜 정숙씨야 말로 이쁜 여자는 멍청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람인 줄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이쁘고 똑똑하며 마음씨 고운 정숙씨가 남들이 하니까로 일관하며 살고 있는 한심한 남들이를 왜 자신의 배우자로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숙씨는 남들이랑 선을 보기 전에도 선을 본 적이 몇 번 있었고, 그 사람들 모두 남들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사회에서 이른 나이에 성공한 사람들이었으며, 하나같이 정숙씨를 좋아했는데 말이다.
정숙씨가 주방에서 음식을 가지고 나와 상에 내려놓고는 남들이의 옆에 앉았다. 남들이와 정숙씨는 참 보기가 좋다. 솔직히 결혼해서 남들이처럼 살 수만 있다면 결혼하는 게 정말 크나큰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채신과 결혼해서 남들이처럼 잘 살 자신이 없다. 그래서 채신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그 망할 놈의 영어가 정말 문제다.
“두 분 결혼 축하 드려요.”
정숙씨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는 축하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그래도 정숙씨가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어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채신이 또 기가 막힌 발언을 했다.
“이 사람이 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요? 저한테 영어로 프로포즈를 했다니까요. I love you, Would you marry me? 라고. 보통 한국 사람들은 Would you marry with me? 라는 틀린 표현을 쓰는데 이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게 바로 절 너무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겠어요?”
사람들은 황당해 했고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같이 있는 사람들이 사람이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비웃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말 좋으시겠어요?”
달타냥이 채신의 말에 동조하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채신을 비웃는 투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럼요. 전 정말 이 사람...”
“우리 한 잔 하죠.”
나는 채신이 또 무슨 멍청한 말을 할 것 같아서 채신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 다섯 사람은 잔을 들어 술잔을 부딪혔다. 정숙씨가 달타냥 보고 물었다.
“남편한테 들었는데 이라크에 가기로 했다면서요.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이라크에 가기로 했어요?”
채신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예.”
달타냥이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이해가 안 되요. 그런 나라에 가려고 하다니? 그 나라는 전쟁이 났는데 축구나 하는 멍청한 나라잖아요?”
사람들은 또 황당해 했고, 나는 채신의 말을 가로막지 않은 내 자신을 탓했다. 그 때 갑자기 현준이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에서는 축구 안 했어요. 외곽에 안전한 지역인 테헤란에서 축구를 했죠.”
정숙씨를 속이기로 하고 온 현준이는 또 정숙씨는 속이지 못하고 채신이한테 화살을 돌린 것이었다. 그 인간은 영어밖에 모르는 채신이가 테헤란이 이라크의 땅이 아닌 이란의 땅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래도 조금은 생각이 있는 나라군요. 하긴 전쟁이 일어나는 한복판에서 축구를 한다면 완전 미친 나라죠.”
나는 사실대로 말하면 채신이가 정말 바보로 판명날 것 같아 가만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래서 가만 있었는데 상황 파악 못한 남들이가 한 마디 했다.
“테헤란은 이라크의 땅이 아니라 이란 땅이잖아?”
남들이의 말을 들은 채신이는 또 현준이한테 속았다는 것을 알고 현준이를 노려 보았다. 그러나 현준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이 음식만 집어 먹었다. 채신이는 그 태연한 행동에 더 화가 나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너같은 인간은 감옥에서 한 번 썩어 봐야 돼. 경찰서에 가자고.”
채신은 저번에 경찰서에 갔다가 망신만 당했던 것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채신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그러지마. 현준이가 장난 좀 한 건데.”
“넌 이게 장난으로 보여? 이 못된 인간은 허곤날 선량한 날 속인다고.”
‘그거야 니가 멍청하니까 그렇지.’ 하고 진심을 말하려다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거짓말을 했다.
“현준이가 널 속인 게 아니야. 사실 이라크와 이란은 형제국가거든. 그러니 테헤란이 이란땅이긴 하지만 이라크 땅이기도 한 거라고. 같은 아랍권이거든.”
이라크와 이란이 같은 아랍권 국가이긴 해도 형제국가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이라크와 이란은 8년이란 긴 세월동안 전쟁까지 벌였다. 하지만 그런 걸 알리 없는 채신은 내 말에 화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런 거 였군. 난 또 저 인간이 나한테 거짓말 하는 줄 알았어. 거짓말 하는 건 죄악이라고.”
“물론이지.”
나는 채신이 같이 멍청한 여자는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난 그만 갈게.”
현준이 남들이를 보며 말했다.
“벌써요?”
정숙씨가 놀라며 물었다.
“집에 가서 할 일이 있거든요.”
“니가 집에 가서 무슨 할 일이 있는데?”
내가 물었다. 현준은 집에 가서 할 일이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넌 나랑 2년을 같이 살고도 어떻게 내가 집에서 뭐 하는지도 모르냐? 난 소설가 지망생이야. 소설을 쓰잖아?”
“니가 언제 소설 썼다고 그러냐? 컴퓨터 켜 놓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지.”
“구상도 엄연히 소설 쓰는 작업의 일부야. 세상에 그 어떤 작가가 구상도 하지 않고 소설을 쓰냐?”
나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달타령, 근데 내가 저번에 준 깔대기 이론은 검토해 봤어?”
“응.”
달타냥이 그 말도 안 되는 현준이의 질문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현준이처럼 정신나간 인간의 말마저도 받아주는 정말 이해심이 넓은 여자다.
“어때? 괜찮지 않니? 연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거 같지 않아?”
“유감이지만 미흡해. 좀 더 연구를 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역시 나한테 학자는 어울리지 않아. 난 역시 소설가가 어울린다니까. 집에 가서 빨리 소설이나 써야지.”
현준은 그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난 저 인간은 왜 저러고 다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니까.”
남들이가 말했다.
“예전부터 그랬잖아? 우리가 이해해야지. 한 잔 하자.”
달타냥이 잔을 들었다. 우리는 가볍게 잔을 부딪히고 술을 마셨다
우리가 술을 마신지도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현준이 자리를 비운지 한 시간 지나 채신도 집으로 돌아가서 자리에는 나, 남들이, 정숙씨 세사람만이 남았다. 나는 담배를 꺼내 피웠다. 골초는 아니지만 술을 마시면 평소 때보다 담배를 많이 핀다. 나는 술이 조금 올라 있었다. 현준이도 나처럼 취기가 좀 오른 얼굴이었다. 멀쩡한 사람은 술을 잘 못하는 정숙씨 뿐이었다. 술이 올라서인지 나는 그동안 정숙씨한테 정말로 궁금해 했던 것을 물었다.
“정숙씨, 정말 이해가 안 되서 그러는데요. 정숙씨는 왜 이런 한심한 인간하고 결혼했어요?”
“야, 내가 뭐가 한심하다는 거야? 너보단 훨씬 나아.”
남들이는 취한 목소리로 외쳤다. 물론 남들이가 나보다 돈은 잘 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남들이가 나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은 한심하지 않아요. 절 구해주었거든요.”
“예?”
나는 놀란 반응을 보이며 TV드라마에 단골로 나오는 장면처럼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에 처한 정숙씨를 남들이가 몸을 날려 구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숙씨가 들려준 얘기는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전 사실 어렸을 때부터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어요.”
뜻밖이었다. 지금 동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정숙씨가 발레를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차례대로 올라가면서 오직 발레만 했죠. 발레가 제 인생의 전부였어요.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서 먹고 싶은 것도 안 먹고 참았죠. 하지만 훌륭한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것은 당연히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전 그렇게 발레를 열심히 했는데 너무 무리하게 연습하는 바람에 아킬레스건이 파열됐어요. 의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는 지장이 없지만 앞으로 발레는 할 수 없을 거라고 했죠. 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제 인생이 모두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울증에 빠졌고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부모님은 저를 걱정했죠. 혹시 남자를 사귀게 되면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해서 저한테 잘난 남자들을 소개시켜 주며 선을 보라고 했죠. 저는 부모님 뜻에 따라 그 사람들과 선을 봤죠. 하지만 선을 볼 때마다 오히려 내 자신이 더 초라해졌어요. 제가 선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람들이었거든요. 서른도 안 된 나이에 10억의 가치가 있는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사법고시 수석 합격자도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최연소 나이로 교수에 임용된 사람도 있었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더욱 심한 우울증에 빠졌죠. 저도 발레리나로 성공하고 싶었는데 발레를 더는 할 수 없게 되어 막막하기만 했거든요. 그러다가 이 사람을 만났어요. 솔직히 이 사람 처음 봤을 때는 마음에 안 들었어요. 기껏해야 담배 회사 다니는 말단 사원이라 그 전에 제가 선 본 사람들하고는 너무 수준 차이가 낫거든요. 그래도 선 보는 자리라서 예의를 갖춰 물었죠? ‘죄송한 말인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너무 뒤쳐진다고 생각지 않나요? 제가 그동안 선 본 사람은 사법고시 수석 합격자나 최연소 나이로 교수에 임용된 사람 등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었거든요.’
전 이 사람이 그 사람들을 부러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러워 하기는커녕 태연하게 말했어요. ‘그런 사람들이야 남들이 공부 할 때 공부하고 남들이 놀 때 공부하고 남들이 잘 때도 공부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전 그렇게 답답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전 남들이 공부할 때 공부하고 남들이 놀 때 놀고 남들이 잘 때 자면서 살 생각이거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뭔가 깨달음을 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사람이 한 말 중에서 공부를 발레로 바꾸면 제가 그동안 살아온 삶과 딱 들어맞았거든요.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답답하게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발레가 인생을 포기할만큼 그렇게 가치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 사람과 헤어져 집에 와서 뉴스를 봤는데 뉴스가 끝나갈 무렵 우리나라에서 최연소 교수가 된 그 사람이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과속으로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정말 잠깐 나오더군요. 그 사람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보단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인생을 빨리 달리려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되었어요. 그 날 이후 전 미련없이 발레를 포기했죠. 이 사람은 저한테 새로운 삶을 준 거에요. 전 이제 발레에는 미련 없어요. 동사무에서 일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 있거든요.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딸이 있으니까요.”
나는 남들이 사상의 위대함을 알아차렸다. 남들이 사상은 한 인간을 살려냈다. 내가 알기로 지구상에 인간을 위해 나온 그 많은 사상중에서 인간을 살려낸 사상은 하나도 없다. 그 사상들은 오히려 인간을 죽이는데에 기여했다. 자본주의 사상은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대공황을 가져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으며,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고 새로 나타난 공산주의 사상 또한 독재와 반대파에 대한 숙청,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싸움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런데 남들이의 사상은 인간을 살려냈다. 가슴속에 휴머니티가 철철 흐르는 나는 갑자기 인류를 위해 남들이 사상의 전파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남은 술을 마저 비우고 남들이네 집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