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이야기
나는 환장하는 줄 알았다. 세상이 넓다고는 하지만 무슨 놈의 이 따위 나라가 다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채신과 내가 신혼여행을 보낸 일주일동안 해가 뜬 날은 하루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자 나는 정말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사막에서 물을 소망하듯 나는 영국에서 태양이 뜨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영국 하늘은 내 소망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언제나 뿌옇기만 했다. 나는 그 개 같은 날씨에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칠 수는 없어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버텨냈다. 미쳐버리면 채신과의 밤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영국에서 채신과 신혼여행을 보내는 그 기간 동안 유일하게 만족스러웠던 것은 밤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겠다. 그런 얘기 하려면 성묘사를 적나라하게 해야 하는데 이 글은 외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성묘사를 적나라게 한 글을 다 외설이라고 볼 순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처럼 꽉 막힌 나라에선 그런 글은 다 외설 취급 받을 뿐이다. 나는 풍기문란죄로 감옥에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예전에 사라의 접시라는 소설을 쓴 일 때문에 감옥에서 징역을 살고 나온 한 교수처럼. 착한 나는 여태까지 감옥에 한 번 가 본 적이 없지만 감옥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적나라한 성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미안하지만 좀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정말 정말 아쉽겠지만 내가 들려주는 영국인에 대한 잡소리로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를 바란다.
나는 중학생이었을 때 어느 책에선가 세익스피어를 인도하고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영국 격언을 읽었는데 영국놈들은 대체 머리가 어떻게 됐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근데 여기 와 보니 그런 말을 한 영국놈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런 개 같은 날씨의 나라에서 살면서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모름지기 사람은 해를 보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안 자?”
내 옆에 누워 있는 채신이 물었다. 채신은 영국에 도착한 날부터 제 세상을 만난 듯이 날아 다녔다. 채신은 유명한 관광명소로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영어가 모국어인 영국인들과 이야기를 하며 너무나도 행복해 했다. 채신은 개 같은 날씨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그런 채신이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나라에선 영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언어라고 생각하는 바보들만이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응.”
“내일이면 돌아가야 하다니?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도 아쉽지?”
나는 기가 막혔다. 정말 이런 나라엔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내일이면 산 좋고 물 좋고 햇빛 가득한 우리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또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기 말야. 우리 비행기 말고 배 타고 가면 안 될까?”
“제 정신이야? 누가 영국에서 한국까지 배를 타고 다녀?”
“남들이 안 그런다고 우리까지 그러지 말란 법은 없잖아?”
나는 목청껏 외쳤다.
채신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솔직히 말하지. 난 비행기가 무서워. 두 번 다시 비행기는 타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비행기 말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다른 방법 좀 생각해 봐.”
“우린 모레부터 출근해야 돼. 비행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바보같이 남자가 되 가지고 비행기나 무서워 하고. 걱정마, 내가 한국까지 편안하게 가게 해 줄테니까.”
“또 비타민을 수면제...”
"바이타민이야."
채신은 나의 말을 자르며 콩글리쉬를 바로 잡아 주었다. 나는 기가 막혔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그래서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 바이타민을 수면제로 속이고 먹일 셈이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널 속인 적 없어”
“이젠 시치미까지 떼는군. 비타민을 수면제로...”
“바이타민이라니까.”
채신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나도 왕짜증이 났다.
“뭘 오해한 것 같은데. 내가 준 건 바이타민이야. 수면제가 아니라고.”
“야 니가 우기기 대장인 줄은 알지만 우길 걸 갖고 우겨? 세상에 어떤 사람이 비타 아니 바이타민 몇 알을 먹고 10시간이 넘도록 자냐?”
“니가 특이체질인가 보지.”
“뭐?”
나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난 불면증 환자도 아닌데 내가 수면제를 갖고 다닐 이유가 없잖아? 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준 것은 바이타민이야. 너도 내가 거짓말을 못한다는 건 잘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바보같은 채신이의 말에 솔깃했다. 확실히 채신은 거짓말을 못한다. 그럼 나한테 준 것이 정말 비타민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비타민 몇 알을 먹고 10시간을 넘게 잤다는 얘기인데...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긴지... 정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가 지났다. 나는 채신과 함께 런던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정말 비행기는 피하고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런 개 같은 날씨의 나라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기뻤지만 역시나 비행기는 무서웠다. 내가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있자 채신이 무언가를 찾으려고 핸드백을 뒤졌다. 한참동안 핸드백을 뒤지던 채신은 옆에 앉은 나한테로 고개를 돌리더니 조금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바이타민을 안 가져온 거 같아. 그냥 조금만 참아. 12시간만 가면 되니까.”
“야, 날 죽이려면 편하게 죽여. 이런식으로 죽이지 말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올때에야 수면제인지 비타민인지 모를...”
“바이타민이라니까.”
채신은 또 나의 콩글리쉬를 바로 잡아주며 말했다. 정말 뺨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또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으면서 채신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올때에야 수면제인지 바이타민인지 모를 그 알약으로 버텼지만 이젠 아무것도 없이 12시간을 가야 하잖아? 그 동안 내가 안 죽으면 그건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넌 다 좋은데 남자가 너무 겁이 많아.”
나는 그 말에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해 졌다. 채신이 혼기를 놓친 나이 때문이 아니라 정말 나를 사랑해서 나와 결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채신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멍청한 바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비행기가 이륙하는 바람에 더는 그런 생각을 지속할 수 없었다. 정말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발 한시라도 빨리 인천공항에 도착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12시간 후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나와 채신은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는 영국에서 내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해가 얼굴을 내민채 빛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비행기 안에서의 무서움을 떨쳐 버리고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다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