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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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를 입고 곱게 화장을 한 채신은 내가 그때까지 본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나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를 볼 때의 버릇인 기침을 했고, 잠시나마 그녀가 멍청한 여자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채신이는 이 세상에서 영어가 가장 위대한 언어라고 생각하는 바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정신을 추스렸다. 어쨌든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 주려고 하객들이 많이 와 있었고 결혼식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정장을 차려입은 내가 먼저 식장으로 들어갔고 뒤이어서 나의 신부가 될 채신이가 아버지와 같이 들어왔다. 나하고 채신은 그렇게 머리는 다 벗겨졌고 이마에는 쭈글쭈글한 주름이 가득한 주례사 선생님 앞에 서게 되었다. 사회자가 주례사 선생님의 말씀이 있겠다고 하자 그 늙어빠지기만 한 인간은 헛기침을 하더니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 늙은이의 말은 정말 하나도 감흥적이지 않고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 늙은이는 하나도 감흥적이지 않은 지 연설에 취해 있었다. 나는 졸음이 몰아닥쳤다. 정말 늙은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수면제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데도 내가 졸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객들이 앉아있는 앞자리에 자수청처럼 아름다운 눈을 가진 채신이의 오빠가 앉아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채신이 오빠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연설이 끝났을 때 우리의 주례를 맡은 늙은이는 길고 지루하기만 했던 지 연설이 만족스러웠다는 듯이 웃으며 나한테 물었다.
“신랑 허정찬군은 신부 유채신양을 검은 머리가 팥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솔직히 맹세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별로 사랑하는 여자는 아니고, 더군다나 결혼한 커플 두 쌍 중 한쌍이 이혼하는 현실속에서 내가 그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게다가 나는 솔직히 채신보다는 채신이 오빠한테 더 끌린다. 하지만 나는 진실과 거짓말을 할 때를 아는 인간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예.”
“신부 유채신 양은 신랑 허정찬군을 평생도록 영원히 아끼고 사랑하겠습니까?”
나는 채신이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건 살아봐야 알겠는데요 라고 대답하던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채신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나는 채신의 대답에 벌어질 예상밖의 일을 생각하며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채신의 대답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예’ 여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순간 채신이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채신은 절대로 거짓말을 못한다. 그러나 나는 곧 생각을 고쳐 먹었다. 현준이의 거짓말에 그렇게 속기만 하던 채신도 이젠 거짓말을 배운 모양이었다. 사실 사람은 거짓말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지 이 한심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 어쨌든 나와 채신이의 거짓말로 우리의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다. 우린 가족과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고 사진을 찍은 후엔 채신이 아직 미혼인 여자들한테 부케를 던졌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내 동생 정연이 꽃을 향해 달려 들어 부케를 받아버렸다. 나는 기가 막혔고 사람들 다 황당해 하고 있었는데 현준은 ‘나이스 캐치’ 하고 크게 외치더니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는 부케를 잡고 좋아하고 있는 정연이한테로 갔다.
“도대체. 니가 그걸 받으면 어떻게 해?”
“던지니까 받았지.”
“넌 결혼했잖아?”
“지금 결혼했다고 날 무시하는 거야? 이거 왜 이래? 나도 밖에 나가면 아직 사람들이 다 처녀로 본다고.”
정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매제가 바빠서 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요? 결혼했다고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죠.”
현준이 언제 내 옆에 왔는지 끼어들었다.
“근데 정연씨는 한 명의 남자로는 성이 안 차나 봐요.”
“넌 또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뭐, 별 말 아냐. 내 말은 이 세상에 일부 다처제인 사회도 있으니까 일처 다부제도 나쁘지 않다는 거지. 그리고 우리 사회를 일처 다부제의 사회로 변화시키기엔 니 동생 정연이가 적격이라는 거야. 남편이 있는 데도 부케를 받았잖아. 정말 멋있었다니까.”
현준은 다시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다가 죽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가 정말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더는 멍청한 두 인간들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아 채신이를 데리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사를 끝마치고 우린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다들 우리의 축복을 빌어 주었지만 내 동생 정연이만은 ‘오빠 인생도 이젠 끝이야. 아는 건 영어밖에 없는 저런 바보같은 여자랑 결혼하다니. 하긴 어떻게 보면 오빠 주제에 저런 여자랑 결혼하는 것도 기적이지’ 하고 말했다. 사람들은 정연이의 말에 황당해 했고 나는 열이 머리끝까지 나서 동생이고 뭐고 실컷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결혼한 날이라 참기로 하고 채신과 풍선이 가득달린 차에 올라탔다. 우린 인천공항으로 떠났다.
“넌 어렸을 때 참 힘들었을 것 같아. 저런 바보같은 동생하고 살았을 테니.”
“그래. 힘들었지. 그리고...”
나는 ‘그리고 앞으로 너하고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을 거야’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왜 말을 하려다가 말아?”
“아니야. 아무 것도. 그건 그렇고 날 정말 좋군.”
“우리가 결혼한 날이잖아. 하늘도 우리의 결혼을 축복해 주는 거라고. 근데 정말 비행기 한 번도 못 타 봤어?”
“응.”
“그 나이 되도록 뭐 한 거야?”
‘니 나이보다 적어’ 라고 말하려다가 또 그만 두었다. 사랑하진 않지만 그래도 결혼한 건 사실인데 결혼하자마자 싸우고 싶지 않았다.
“넌 나한테 고마워 해야 돼. 내가 비행기 태워주는 셈이니까.”
우린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비행기 시간이 되자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는 빠른 속도로 활주로를 내달렸다. 나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할 때부터 겁이 더럭 났다. 비행기가 이렇게 무서운 거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로 타지 않았을 것이다. 채신이를 흘끗 돌아 보았는데 채신은 멀쩡했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인지 마치 겁을 상실한 여자 같았다.
비행기가 한 번 덜컹 거리더니 하늘로 솟아올랐다.
“살려줘요!”
나는 그만 비명을 질렀다. 스튜디어스가 나한테 다가왔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살려줘요. 이 여자가 날 죽이려고 해요,”
“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왜 널 죽여?”
“니가 신혼여행을 영국으로 가자고 해서 비행기에 탄 거 아냐. 비행기가 이렇게 무서운 거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로 타지 않았을 거라고.”
“바보같이 남자가 되 가지고 비행기가 뭐가 무섭다고 그래?”
“아무래도 손님은 비행기 공포증이 있으신 거 같네요. 제가 물 한 잔 갖다 드릴 테니까. 물 좀 마시고 안정을 취하세요. 그럼 괜찮으실 거에요.”
“런던까진 얼마나 걸리죠?”
“12시간이요.”
“예? 이제야 알겠어. 사람들이 왜 결혼은 무덤을 파는 일이라고 하는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12시간을 가야 한다고 하잖아? 그 안에 내가 안 죽으면 그건 기적이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거나 먹어.”
채신은 가방에서 알약을 몇 개 꺼내더니 나한테 주었다.
“이게 뭐야?”
“바이타민.”
대단한 영어선생 채신은 외래어는 항상 원어 발음 그대로 발음한다.
“그냥 비타민이라고 하면 안 돼. 바이타민이 뭐야?”
“비타민은 콩글리쉬야.”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콩글리쉬 아닌 말이 어딨어?”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를 못하는 거야.”
“관두자.”
나는 더 이상 말을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는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끝내고 채신이 준 비타민 몇 알을 먹었다. 그 이후의 일은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다만 내가 런던에 도착하기 전 엄청 잠을 잤다는 것 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