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작은 틈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계세요?"
이미 아무도 없다는 걸 예측한 했지만 혹시나 해서 입을 연 것이다. 역시 기척은 없었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엘리베이터는 꼭대기층인 5층에 있었고 주변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나는 전보다 큰 목소리로 말했다.
"계세요?"
내 말의 메아리 조차 없었다. 얼른 문을 닫고 거기다 잠궈버렸다. 실내등의 스위치를 어리바리한 모습으로 찾아댔다. 불이 켜지자 눈 앞에 보이는 건 일반적인 가정집 모습 그대로였다. 속전속결이라 했다. 신발을 벗지 않고 장판을 밟는 건 군대 시절, 준비태세 이후로 처음이었으리라. 물이 흥건한 발자국으로 거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훔칠지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이 집으로 들어가겠다는 계획과 도둑질을 일삼겠다는 결심뿐이었다.눈에 보이는 건 내가 가져가기에 너무나 크고 버거운 것들 뿐이었다. 나는 일단 방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각각의 방을 들어가자 혹시나 했던 사람들은 없었다. 너무나 다행스러웠고 동시에 긴장과 떨림은 배가 되었다.
띠디-
내가 처음으로 뒤져본 방에는 가장 먼저 노트북이 눈에 띠였다. 갖은 선들을 부리나케 떼어내고 침대에다 던졌다. 곧바로 책상 서랍을 뒤져보았다. 디지털카메라 하나가 보였다. 역시 침대에다 그걸 집어 던졌다. 옷장을 열자 특유의 포근한 냄새가 퍼졌지만, 당시 나는 그 딴 걸 느끼기에 너무나 조급하고 침착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서 돈이 될만한 것들을 챙기고 떠나자, 그것 뿐이다. 옷장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 여자의 방인듯 여자 옷들로 가득한데, 여자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가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맥주 한 짝은 거뜬히 넣을 수 있는 큰 가죽가방이 있었다. 노트북과 디지털 카메라를 거기다 담고 어서 방에서 나왔다.
시간이 다소 많이 흘러 간 기분이 들지만 나는 충분히 신속했다. 마치 내가 군대에서 지휘관이나 상급자의 명을 받고 부랴부랴 움직이던 때로 돌아간 느낌이다. 긴 머리의 여자가 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그럴수록 내 심장박동은 더욱 더 격렬해진다. 다음 방은 매우 소박했다. 서랍장을 열어보니 금반지가 나왔다. 하마터면 '그래, 이거야'라고 소릴 지를 뻔했다. 주머니에다 챙겼다. 그럴싸한 하모니카도 챙겼다. 역시 옷장이 있어 열어 보았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의 방인가 보다. 옷도 별볼일 없을 뿐더러 구닥다리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내가 알고 있는 옷 상표는 프레디페리 뿐이었다. 담담한 베이지 바탕에 소매와 목깃 끝마다 빨간 선이 근사하게 처리된, 이 중에서 가장 예뻐보였다. 옷은 그 뿐, 여자의 방과 마찬가지로 옷장은 별 볼일 없었다. 그 큰 가방이 반도 차지 않았다. 생각보다 수확이 부실했다.
그래서 더욱 샅샅히 뒤졌다. 그런데 부산대는 와중에 밖에서 무언의 기척음이 들렸다. 순간 멈칫했다. 숨소리를 억눌린 채 가슴이 쿵쾅거렸다. 관자놀이가 맥박으로 지끈거린다. 신경은 오로지 귀로 쏠렸다. 누군가의 걸음소리. 점점 가까워지고 또렷해진다. 나는 베란다 쪽으로 몸을 옮길려고 했지만 너무나 느닷없는 소리에 얼어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걸음도 멈췄다.
띠디-
또 그 놈의 지겨운 배터리 경보음이 울러퍼진다. 늦은 마당이지만 폰을 끄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앞서 말했듯이 나는 움직일 수 없는, 얼어버린 상황이다. 그저 숨소리를 억눌린 채로, 눈만 댕그랗게 뜬 채로, 입을 살며시 오므렸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는 다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의 이마와 코는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바닥은 다시 갈빛 발자국으로 뒤범벅 되기 시작했다. 거실의 TV 아래에는 낮은 서랍장이 있었다. 일일이 여닫이를 열어가며 담긴 것들을 확인해 보니 역시 그다지 영양가가 없었다.
이제 확고해졌다. 미련없이 돌아가자고 말이다.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가방만 들고 문 앞으로 나아갔다. 그 와중에 아쉬운 모양이지 신방장을 열었다. 아무런 고려도 없이 신발들을 주섬주섬 가방으로 집어 넣었다. 경황없이 넣어 댄 터라 삐죽삐죽 구두코가 죽순처럼 나왔다. 그래서 가방의 지퍼를 닫지 못했다. 문의 잠금장치를 낑낑거리며 풀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 보았다. 여태까지 보지 못했다. 그런데 과연 누굴까? 누군가의 영정 사진이 날 스윽 바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섬짓한 마음에 가슴이 철렁거렸다. 무표정은 아니고 희미한 웃음도 아니고 아무튼 형언 할 수 없는 어느 중년 여자의 얼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그 여자는 눈 각도로는 전혀 날 볼 수 없었지만 날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슴 속에 고요한 소용돌이가 친다.
띠디-
나는 그런 소용돌이 따윈 모르겠다. 문을 박찼다. 정말 힘차게 뛰었다. 문에서 나와 계단을 타고 내려 오고 현관 유리문을 여는 나의 동작이 각각의 부분 동작이 아닌 통일된 한 동작처럼 보인다. 어깨의 묵직한 가방이 성가시게 굴었지만 힘든 줄 몰랐다. 가방이 들썩거리며 나의 날개뼈를 강타할 때마다 채찍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모두가 피했을 물 웅덩이를 박차고, 누군가 얼마 전에 버린 깡통도 짓밟고, 불쑥 튀어 나오는 차에 화들짝 놀라지도 않았다. 누구나 나를 보면 분명 수상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비 내리는 배경은 이런 날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이미 젖은 신발이지만 울컥 물이 들어가고, 밑단은 형편없이 젖어버렸다. 하지만 뛴다. 계속 뛴다. 이런 빌어먹을 빗방울은 한결 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꾸며주고 있을 것이라 나 스스로 생각해 본다.
얼마나 뛰었고 시간은 얼마나 지났는 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나의 다리와 어깨, 목구멍은 매우 정확한 줄자와 시계가 되고자 하는 것만 같았다. 점점 목구멍이 매울 정도로 따가워지고 어깨는 빠질 것만 같고, 다리는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정신 없이 달릴 때는 몰랐는 데 이성이 돌아오자 덩달아 감각도 돌아왔다. 달리는 것도 아닌, 걷는 것도 아닌 애매한 모양새로 나아가다 결국 어느 전봇대 앞에 다리를 멈췄다. 들썩거리던 가방도 물방울을 튀기며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전봇대에 몸을 기대며 추스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맘처럼 되지 않는다.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고르자 닫힌 입은 숯불 위의 조개입처럼 펑 터진다. 이런 민망한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하자 안정되기 시작했다.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말이다. 비를 피할 만한 아무 계단에 주저앉았다. 숨은 천천히 규칙적으로 바뀌고 어깨의 들썩임과 가슴의 움직임도 사라졌다. 나는 위기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묘한 성취감과 짜릿한 쾌감이 뭉게뭉게 부풀어 오르는 것도 느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달려 왔던 방향으로 계속해서 눈이 가는 걸 막지 못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 나는 다시 계속해서 뛰기로 했다. 아무리 성취감이고, 쾌감이고 좋다만 그래도 겁나는 걸 덮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뭐, 몸이 으슬으슬해서 뛰었던 걸로 하자. 나는 곧바로 집으로 가지 못했다. 돌아서 돌아서 집으로 갔다. 물론 낯은 익지만 내가 잘 모르는 길이거니와 내 나름대로의 얄팍한 생각에서 기인된 잔꾀인 것이다. 그래서 굵은 빗방울을 나는 좀 더 맞아야만 했다.
드디어 집이다. 이제는 뛰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꼭꼭 숨어야 된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형은 참치캔을 앞에 두고 라면을 먹고 있었다. 비에 젖은 나의 몰골을 보자 형은 라면맛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가까스로 벗었다.
"왜 이렇게 비를 많이 맞았어?"
형은 상을 뒤로 물리고는 다가왔다. 그리고 흠뻑 젖은 가죽재킷과 티셔츠, 바지, 양말 게다가 팬티까지. 벗어 던진 것들을 주섬주섬 모아 한 곳으로 밀어두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샴푸와 비누 없이 그저 물로만 머리와 몸 군데군데를 씻겼다.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내가 분명 이상했을 것이다. 철지난 겨울 옷들을 장롱에서 꺼냈다. 속옷 위에 그것들을 입는다. 포근한 옷냄새를 이제는 느낄 수 있었다. 보아하니 형은 다시 라면을 먹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오늘 종일 밥 한숟가락 입에 넣지 못했지만, 그런 일용할 양식보다 전기장판에 불을 켜는 게 더 중요했다. 숙취가 다시 느껴지지 시작한 것이다. 편두통과 함께 흡연욕구가 시작했다. 방에서 나와 보니 형은 그릇을 다 비우고 있었다.
"형, 담배 어디에 있어?."
"잠시만 상 좀 치우고, 나가서 한대 피자."
비가 내리는 풍경 아래, 우리는 담배를 피웠다. 수많은 빗방울 때문에 푸른 연기는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서서히 희미해져간다.
"어제 술 많이 먹었냐? 어제 안에는 온다 그러더니."
"약간 많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어쩔 수 없었어. 한번 볼 때 확실히 봐야지."
형은 살짝 웃어보였다.
"그래, 맞아. 나이 먹으면 더 보기 힘들다. 잘했다. 그런데 가지고 온 가방은 뭐냐?"
나는 당황했다. 뭐라고 해야 할 지 앞뒤가 막히기 시작했다.
"친구가 유학간다고 잠시 맡긴 거야."
"유학? 어디로 가는데?"
나는 방으로 들어가 비 맞은 가방을 무심한 표정으로 툭 던졌다. 담배를 펴서 그런 지 편두통이 조금 더 심해진 것만 같다. 화장실에서 옷가지들을 세탁기에다 몽땅 넣고 돌렸다. 하마터면 가죽재킷도 돌릴 뻔했다. 재킷의 물을 털고 옷걸이에 걸고 보니 마침 생각난 게 있었다. 핸드폰이다. 폰도 나와 똑같은 꼴이었다. 물에 빠진 것과 똑같은 꼴이라 덜컥 겁이났다. 충전기에다 꽂고 전원버튼을 누르니 다행스럽게도 불이 들어왔다.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실망스럽다. 아직까지 전기장판이 충분히 따뜻하지 않았다. 두터운 이불을 꺼내다가 덮자 으슬으슬한 기분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평온해진다. 아직 전기장판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남은 반나절은 이렇게 고요하고 깊은 곳으로 침전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침전하기 전에 빼놓지 않고 되새겼다. 가상의 친구, 성광이는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