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끼리 나누는 정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버스는 정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77번 만원버스 속의 사람은 많아도 너무 많은 데 서로 정이 닿지 않고 오히려 튕겨내는 느낌이다. 자기가 짊어지고 있는 가방이 옆 사람에게 닿지 않도록 고심하는 게 정이라면 정일 테지. 그 일면에는 귀중품에 대한 경외심이 깔려 있겠지만 말이다. 기분 탓인지, 날씨 탓인지, 만원인 탓인지 버스 안이 답답하고 어둠기만 했다. 십 몇 분간 태익이와 전화를 했던 폰의 액정을 매만지다 주머니로 넣었다. 부저소리가 따갑게 귓등을 친다.
77번 버스는 살처럼 지나가는 법이 없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더 체증을 빚고 있다. 어제 먹은 안주와 똥물 같은 술이 내장 깊숙한 곳에 쌓여 내 속의 체증도 더할 나위 없이 꽉 막혀있다. 반면 조잘 되는 여학생들의 사담은 청산유수가 따로 없다. 내심 그들끼리 나누는 정다움이 부럽고 질투 나기도 한다. 해가 중천에 떠있음에도 불구하고 술기운이 내 몸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는다. 앞뒤로 요동치는 버스 속 인파는 정신없는 날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숙취 때문에 담배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입술이 간질간질해진다. 부저소리가 또 따갑게 귓등을 친다. 그래 차라리 내리자.
뛰어내리다시피 버스에서 나왔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찌그러진 그 속에서 거짓말처럼 몇 개비가 들어있었다. 역시 럭키스트라이크는 날 배신하지 않는다. 아마 향후 30년 동안은 날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라이터를 찾으려 했지만 그 놈의 술 때문에 있어야 할 주머니에 없었다. 정류장 옆에서 하염없이 담배를 태우고 있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불을 빌리고 나서야 연기를 한 모금 뱉을 수 있었다.
내가 내린 곳에서부터 집까지는 걸어서 꽤나 오래 걸린다. 후회가 밀려 온다. 대로변들의 차들이 울컥 부러워진다. 역시 조잘대며 날 스쳐지나 가는 거리의 인파들도 부럽기는 마찬가지다.
뚝, 뚝, 툭. 촤아아-
비다. 갑작스런 빗방울이다. 그렇게 예고도 없이 떨어졌고 인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꽉 막힌 대로 속의 차들과 우산을 챙긴 사람들만 여유롭다. 우산은 없었지만 그 중에 나도 똑같은 여유로운 존재다. 가죽재킷은 빗방울을 우의처럼 막아줬고, 갑작스런 빗방울이지만 결코 거슬리지 않는다. 비를 맞으며 조금은 안정된 기분을 즐기며 천천히 걸어 나아간다.
대로 가장자리의 거리를 나와 작은 샛길로 빠져들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이 제법 고역이었는 지 적당한 곳을 찾기로 했다. 차양이 있는 구멍가게가 보였지만 비가 들이치는 경계선에 진열장이 들어서 내가 발 디딜 곳은 여의치 않았다. 계속 걸었다. 걸음은 이내 뜀으로 바꿨다. 얼마 가지 않아 비를 막아주는 빌라 입구의 지붕을 발견했다. 빗방울이 지붕에 튕겨 물 파편이 경쾌하게 길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드디어 비를 피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은 것이다. 약간은 가뿐 숨을 고르며 목깃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훔친다. 토사물 딱지가 묻은 내 신발이 조금은 햐얗게 변해서 좋았으나 양말이 젖은 건 아니 좋았다. 나는 가죽재킷을 벗어 털어댔다. 방금 빤 수건을 턴 것처럼 물기가 흩어진다.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는 목을 제외하곤 그리 젖지 않았다. 머리도 털어대다 입구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을 우연히 봤는데 새로워 보인다. 점잔을 빼며 내려앉은 긴 머리가 반짝이며 가닥가닥 뭉쳐있으니 말이다 . 반사된 그 모습을 나는 꽤 오랫동안 유심히 본 것 같다. 비를 피해 종종 걸어가는 사람들은 이런 날 꽤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골목길에는 사람들이라곤 우산을 쓴 사람 뿐 나처럼 비 때문에 쩔쩔매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라도 있으면 위로라도 될 것만 같았는데.
아스파트 골목길의 때를 말끔히 씻겨주기라도 한듯 빗물은 물결을 이루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 날씨가 무더워지면 이파리가 무성해지질 새순들도 오늘따라 싱그럽게 보인다. 그처럼 비 오는 풍경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담배 생각에 담배를 하나 물어 핀다.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이 와중에 심심함과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오래 서 있었다. 비는 이제 더 이상 감상의 존재가 아니라 나의 길을 막는 단순한 천재나 다름없었다. 빗소리가 더욱 숨 가쁘게 떨어진다. 그 소리에 나는 문자 메시지가 온 걸 못 들을 뻔했다.
「어디냐?」
형이었다. 문자메시지는 짧았지만 매우 다정한 존재였다. 형과 나는 무려 8살이나 차이가 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형을 무척이나 잘 따르고 반대로 투정도 많이 부렸다. 순종적이든 반항적이든, 내가 형에게 대함에 있어 형은 대부분은 날 따뜻하고 친밀하게 다가왔다. 형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찌 보면 나의 피붙이는 형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 많은 친척, 외가들 중 연락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기억 속의 얼굴마저 퇴색될 정도로 만나지 못한지 오래되었다. 그렇게 된 연유는 아무래도 아버지와 관계된 문제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다른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피붙이의 그리움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것에 연연할 정도로 나의 심사가 여유로운 건 아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애써 무관심으로 일관 했을 것이다.
「조금 있다 집으로 갈 거야」
「나도 조금 이따 갈 것 같다. 집에서 보자」
그렇게 문자를 주고받자 휴대전화의 배터리 경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때 이 빌라 1층에 사는 어느 젊은 여자가 집 문에서 나타났다. 그 여자는 계단을 부랴부랴 내려와 현관 유리문을 열어 젖혔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가 방해 되지 않게 길을 내어주었다. 이 여자는 비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는 표정이 경건하긴커녕 무척 날카로워 보였다. 여자의 옷차림을 보니 당연히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편안해 보이는 트레이닝 바지 밑단에는 더러운 빗물이 묻을 것이며 하늘하늘 거리는 티셔츠는 스산한 바람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감상적인 느낌이라곤 전혀 없는 장맛비처럼 변한 지 오래라 운치보다는 얼마 뒤에 닥칠 장마생각에 징글징글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여자는 그 긴 목을 쭉 내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 여자를 약간은 흥미롭게, 조금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는데 그러던 중 나와 눈빛이 마주쳐 서로 잠시 민망해 했다. 아마 여자도 비를 흠뻑 맞고는 머리에는 하얀 김을 내뿜는 내가 이상하고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짧아도 짧은 그 잠시는 전화를 충전해 달라고 조르는 경보음에 환기되었다. 그 소리가 무척이나 민망했다. 여자도 민망함을 거두듯 고개를 돌렸다. 약간은 서툴게 우산을 펴고는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나아갔다. 나아가고 나아가 긴 머리의 뒤태도 서서히 희미해져갔다.
스산한 바람이 구석구석을 파고들자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침침한 이 곳은 밖과는 다르게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엘리베이터도, 우편함의 각종 고지서도, 자전거도 모두 다 정지해 있다. 특히 아무도 가져가지 못하게 꽁꽁 잠겨둔 자전거들은 서도 부대끼며 숨죽이고 있었다.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전단지 몇 개를 훔쳐 보았다. 그러나 이내 흥미를 잃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치길 빌며 바만 바라보는 것 뿐이다. 그런데 정말 비만 보았을까? 더 이상 눈을 돌리지 않고 비만 봤어야 했는데 나는 왜 안으로 시야를 돌렸을까? 물론 우연히 보았지만 이 사소한 우연이 굴절의 시작임을 누가 알았으랴?
우연히 본 것은 다름 아닌 그 여자의 집 문이었다. 그 집 문은 거의 닫힌 거나 마찬가지로 아주 얕게 열려있었다.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듯 나는 꽤 오랫동안 그 문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틈을 유심히 본 것 같다. 무언의 말이라도 할 것처럼 얕게 벌린 입처럼 문도 무언의 말을 내게 하는 듯 했다.
띠디-
축 처지는 배터리 경보음이 실내라 그런 지 크게 울려 퍼진다. 지금 생각하니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때 왜 갑자기 얄궂은 생각이 했을까? 처음에는 단순히 돈이 궁해서라 답했지만 꼴똘히 생각해 보니 별다른 게 없었다. 모든 사람은 한번쯤은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다. 그게 답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생각만 했을 뿐 행동을 옮길 수 있는 용기나 배짱 따윈 전혀 없었다. 처음 문을 보았을 때 ‘아, 문을 잠그지 않았고 열려 있구나.’이며 두 번째는 ‘문을 잠그지 않았으니 누군가 함부로 들어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뿐이었다. 나의 눈은 어디까지나 현실로 개입할 수 없는 순수한 3인칭 관찰자의 눈이었다. 그런데 눈이 아닌 머리는 ‘아뿔싸!’란 말이 나오기 전에 1인칭주인공의 생각으로 돌변한 것이다.
띠디-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올라갔다. 나는 오른쪽의 여자의 집과 왼쪽의 맞은 편 집을 번가라 바라보았다. 맞은 편 집인지 여자의 집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집은 TV가 켜져 있음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나는 '얄궂은 짓을 할 건지, 말 건지'를 생각 한 게 아니라 '조금 더 고민해 볼까 말까'를 생각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매우 빨리 생각은 일단락되었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여자네 집의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이것은 매우 놀랄 일이었다. 물론 일종의 실험내지는 간보기라지만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적막한 이 곳에 초인종소리가 울려퍼진다. 내 앞에 있는 문 너머로 기척이 들린다면 부리나케 도망갈 생각이었다. 수 초가 흘렸다. 나는 한번 더 초인종을 눌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다시 눌려도 반응은 똑같았다.
나는 현관으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이제 담배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빈 담배갑을 꽉 쥐었다. 그리고 너머의 한점을 뚫어지게 보았다. 복잡한 생각과 단순한 생각을 동시에 했다. 복잡한 생각이라 하면 양심적, 준법적, 윤리적, 도덕적 통념이고, 단순한 생각은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야’라는 식이었다. 성격이 다른 생각들은 서로 얽히고설키고를 반복하다 내가 풀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럴수록 엉망인 실타래를 풀려고 머리 속의 손마디는 펴고, 굽히고를 부산거리며 반복했다. 그러나 한점만을 응시하는 내 눈빛은 미동도 없었다. 띠디- 하는 배터리경보음은 그칠 줄 모르고 또 울렸다. 그 때 내 눈빛이 잠시 일렁거렸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땅에 닿아 흩어지는 물 파편처럼 순식간에 내 머리속에서 흩어진다. 어제밤에 설파한 나의 말과는 모순되게도 나는 구겨진 담배를 길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아무도 없다. 장대처럼 내리 꽂는 비뿐이다. 얼른 몸을 돌렸다. 내 몸은 숙취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어떻게 그런 기지까지 부렸는 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는 버튼을 눌리자. 붉은 숫자 3의 엘리베이터 위치등은 2, 1로 바뀌면서 여자네 초인종과 비슷한 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들어가 제일 꼭대기 층으로 올려 보내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묵묵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자네 집의 문틈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이 때부터 나의 심장박동은 다소 빨리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