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돈으로 흘러간다. 돈이 없으면 세상은 방전된 시계처럼 멈출 것이다. 돈이 있어야 사람은 연명할 수 있다.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돈이 있어야 사람은 허기를 모면할 수 있고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은 굶어 죽고, 병들어도 치료할 방법이 없다. 돈이 있어야 공부도 할 수 있고, 편의점에 가서 그 흔한 껌도 사 씹을 수가 있다. 돈이 없으면 집으로 가는 77번 버스도 탈 수 없고 시외터미널로 가는 82번 버스도 탈 수 없다. 돈이 없으면 가죽 재킷도 입지 못하고 MP3는커녕 그에 꽂는 이어폰도, 건전지도 사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 지갑도 사지 못하고 설사 구한다 해도 그 속에 돈도 카드도 사진도 신분증도 넣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 아디다스 신발도 사지 못하고 회색 데님바지도 입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 CB400도 타지 못할 것이고 기름도 거기에 넣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 럭키스트라이크를 피지 못하고 공짜로 얻었다한들 불을 지필 수없다. 돈이 없으면 핸드폰도 사지 못하고 전화도 할 수 없다. 돈이 없으면 컴퓨터도 사지 못하고 인터넷은 생각도 할 수 없다. 돈이 없으면 세상은 모든 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을 살 수 있고, 가진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돈으로 흘러간다. 돈이 없으면 세상은 방전된 시계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돈이 있으면 세상은 다시 자연스러운 물처럼 흘러간다.
<모든 사람은 한번쯤은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다.>
1.
잿빛으로 기억될 그날. 난 말없이 홀로 정류장 시트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빗방울이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왜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지? 하늘을 망연하게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다 다가 오는 버스번호를 바라 봤다. 77번 버스가 아니다. 하긴 77번이 그리 호락호락한 버스가 아니지.
토요일이라 빨리 마치는 통에 주변에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조잘거리는 말은 병아리처럼 경쾌하기만 했다. 주말은 늘 이렇게 여유롭고 생기가 넘친다만 흐린 날씨 때문인지 단조음악을 들은 것처럼 이따금 기분은 무겁기도 하다. 그래, 오늘 날씨는 '취한 후에 오는 허망함'을 다른 곳으로 둘러대기에 딱 좋은 핑계감이다.
어제 먹은 술은 참 고약했다. 지금은 힘 빠진 하루살이마냥 나약해 보이지만, 어제 밤은 가로등불 아래 나방처럼 굴어댔다. 나 때문에 상민과는 얼른 헤어졌고, 그나마 끝까지 붙어 있던 태익도 날 버리고 갔다. 아마 ‘도망을' 갔을 것이다. 친구들에게 마저도 나란 놈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놈일 것이다. 어제 술을 먹고 과연 무슨 망측한 짓을 일삼았을까? 족보가 다른 버스들는 하염없이 지나간다.
「잘 들어 갔냐?」
태익의 문자메시지다. 내가 도대체 뭘 했지? 문자의 답은 둘째 치고 내가 어제 뭘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태익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야기 왈 이렇다.
무척이나 답답한 어제였다. 하늘에는 별도 하나 없고 달 역시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상민과 태익 그리고 나는 벗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술자리에 만났더랬다. 술은 거하고 저마다의 넋두리는 듣기가 아니꼬울 정도로 팔자걱정이 심했으리라. 하지만 이야기 말미에는 나의 사적인 논평이 주를 이뤘다고 했다.
“이놈의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야 문제. 어떻게 된 게 사람들은 거리에 대한 심미적인 관념이 한 치도 없어, 한 치도. 생각을 해 봐. 거리의 모습을. 담배꽁초, 하얀 휴지들, 찌그러진 캔, 담뱃갑, 웃기지도 않는 전단지, 가래 섞인 침 등등, 온갖 쓰레기들뿐이야. 이래서야 말이 되겠어?”
상민과 태익은 꿍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 뭐? 거리에 대한 심미적인 관념?”
나는 쏘아붙이는 상민의 물음에 아랑곳 않고 꽤나 거창하게 답했다.
“문제는 간단해. 의식이야 의식! 일본이 왜 대단한 줄 아냐? 그 놈들은 의식을 가지고 있어, 의식을. 아주 간단한 거야. 깔끔함, 청결함. 그게 다야. 시민이라면 당연하거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만큼 힘든 게 없지. 사람들이 전혀 생각치 않아. 왜 거리가 깔끔해야 하고 정갈하고 깨끗해야 하는지. 사실 길이란 게 그래. 모두의 것이야. 이 도시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의 것, 도리어 다르게 말하자면 한 사람의 것 즉 개인의 것이기도 하지. 핫! 그래,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될 수도 있어. 어쨌든 사람들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어. 거리? 그냥 길이야. 자기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지. 주머니에 거치적거리는 게 있으면 그냥 길에다 무심코 내다 버리는 거야. 아까 전에 일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일본은 안 그래. 사진 속의 일본을 봐. 거리가 아주 깨끗해. 쓰레기 하나 없고 정갈함 그 자체야.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아. 일본만 그런 줄 알아? 독일도 그렇고 네덜란드도 그렇고 핀란드도 그렇고 다 그래. 정말 정갈하고 깨끗해.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때? 모든 것이 오물이고 쓰레기야. 이 가게 문만 열어도 100m 반경에는 우리가 평생 버리는 것보다 더 많이 깔려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나라는 도시 계획이 어찌나 개 같은 지 아주그냥 지 마음대로도 그런 지마음대로도 없어. 미국만 봐도 그래. 블록 블록으로 나눠서 길이 나 있고 집들도 자를 잰 듯 깔끔하게 지어져 있잖아.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때? 꼬불꼬불 길하나 찾아가려면 몇 시간이나 소비해야 하고, 블록이란 개념도 없어. 산 위에 올라가서 도시를 보면 이런 난장판이 없어. 도시 경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스카이라인도 전혀 고려치 않는, 돈 꽤나 있는 졸부 같아."
나는 입을 잠시 멈추다 이런 말도 한 것 같다.
"그래 이 말이 정답이다. 졸부들의 난민촌 같다니깐!”
상민의 눈빛은 나의 고리타분한 이야기에 안주만 곱씹었다. 태익은 폰을 열고 문자 쓰기에 열중이다. 나는 좀 서운했다. 내가 설파한 것들이 살얼음 녹듯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이쯤에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었다. 이런 놈들과 나의 이데올로기까지 이야기하기에는 내 침이 아까울 정도니깐. 나는 멋쩍은 듯 안주를 한 젓가락 입에 물었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말없이 잠자코 있는 것만큼 의미 없는 게 없다. 나란 놈은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그것도 술자리에서는 한번도 쉼 없이 입방정을 해야 한다. 그러니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만큼 나에게 의미 없는 행위는 없는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설파만큼이나.
“우와, 이놈의 술병 좀 봐라. 이게 도대체 몇 병이냐?”
빈 소주 열 병이 아무것도 없는 메인디시, 그러니깐 불판보다 더 빛이 났다. 분위기는 이미 자리를 뜨는 걸로 기운 걸 직감하고, 그걸 말릴 소재도 화제도 내겐 없었다. 상민이가 카드를 긁고 태익이가 몇 만원을 그에게 준 것도 같다. 나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초라하게 남아 있는 고기 한 점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야야, 일어나자. 계산 했어.”
상민이가 내 어깨를 붙잡으면 말했다. 난 미동도 없이, 표정하나 바뀜 없이 그 자리를 고수했다. 태익은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다 이건 아닌 모양인지 아쉬운 자가 설득하는 투로 말했다.
“완수야. 이제 가자. 시간도 꽤 됐어. 12시야.”
그런데 나도 참 이런 말은 왜 꺼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왜 한국인들은 하나 남은 고기를 꼭 남겨 둘까? 키우는 개나 줄라고?”
갑작스런 나의 생뚱맞은 소리에 둘은 설득은커녕 주변 사람의 시선에 민망해하며 나의 팔을 들어 올렸다. 홀로 남은 검게 탄 고기 한점도 내 말이 무척이나 민망했을 것이다.
“이것도 한국인의 쓸데없는 체면의식이야. 그놈의 체면이 뭔지, 사람들이 쿨하지 못해. 꼭 없는 놈들이 체면은 그렇게 따진다니깐. 안 그래? 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냐.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전혀 개방적이지 못하고 폐쇄적이고 단절된 생각들만 한다니깐. 우리가 왜 일본 놈들한테 몇 십년간의 역사를 빼앗겼냐? 그게 다 개방은 하지 않고 내 것만 좋다고 체면만 내세우니깐 근대화가 늦어져서 이렇게 된 게 아냐? 생각을 해봐. 체면 따지다가 개차반 된 역사가 한 둘이 아니라니깐. 인조반정 때 강화도가 서울이 된 걸 생각해봐? 우습지도 않냐? 섬 하나가 하루아침에 한 나라의 수도가 된 게? 이건 세계사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예야.”
그 다음 이야기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상민과 태익이 내 팔 하나하나를 붙잡고 가게 문을 빠져 나온 모양이다. 가게 밖은 내 말대로 쓰레기들이 산재해 있고 특히 나의 눈에 거슬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전단지로 얼룩져있었다. 밤하늘은 별빛하나 달빛하나 없는 칠흑과도 같았고 네온사인, 자동차 라이트, 가로등 불빛, 상점의 백열 혹은 형광등불, 저마다 들고 있는 휴대전화 액정속의 작은 빛, 거리의 가장자리에 늘어선 파리한 입간판. 모든 것이 인공적인 빛들뿐이다. 나는 그런 생기 없는 불빛 아래에서 취기가 올라와 그만 토를 한바탕 하고 말았단다. 그 말을 들었을 땐 참을 수 없는 민망함에 이마가 터질 것만 같았다.
“정말이냐?”
더 이상의 말을 이을 수 없었고 빈 상자 같은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뭐, 그랬던 것 같긴 하더라.”
아침에 본 신발의 검은 딱지들이 토사물의 흔적임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의 입에서 나의 치부를 들으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전화를 끊어버릴 뻔 했다. 하지만 어느새 정체모를 태연함도 스윽 밀려왔다. 그래서 계속 태익의 목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77번 버스가 지나갔지만 구태여 버스를 타지 않았다. 버스에는 학생들로 넘쳐난 것도 이유긴 하지만 힘없이 그저 정류장 의자에 앉고만 싶었다.
“야야, 일어나! 새끼야.”
상민은 계속해서 인사불성인 나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했겠지만 들을 리 만무했다. 태익은 앞에 있었던 가게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감아와 토로 범벅이 된 입 주변을 닦아댔다. 아마 똥오줌 못 가리는 아기의 뒤를 닦아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다리는 이미 힘이 풀린 지 오래라 태익과 상민은 날 리어카처럼 끌다시피 했다. 민망하지만 거기다 더 가관인 건 전봇대를 부여잡고 떼를 부렸다고 하니 나는 정말 아기가 된 모양이었다.
“이 자식 좀 잡아봐. 빨리빨리.”
상민은 매미처럼 딱 붙은 날 떼어내려고 태익과 함께 갖은 완력을 총동원했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내 몸이 어지간히 무겁던 모양이다. 어쩌면 나도 갖은 완력을 총동원했는지 찰싹 달라붙어 한계란 걸 몰랐던 모양이다. 나는 술기운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더욱 전봇대에 몸을 의지했던 것 같다.
“괜찮아 친구들아. 난 괜찮아. 나에겐 긍지가 있고 자존심이 있어. 나 임마, 절대 넘어지지 않아!”
더듬거리는 말투로 나불대는 통에 녀석들은 나에게 정나미마저 뚝 떨어졌는지 날 붙잡은 손을 놓고 자기들 허리춤에 갖다 붙였다. 그리고 저마다 가뿐 한숨을 터트렸다. 상민은 그 자리에서 담배를 하나물고 빤히 날 쳐다보다 떠났다고 했다. 상민의 눈빛이 어땠을지 알 것 같다.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특유의 가는 눈빛일 것이다. 상민이 떠난 이후 태익은 남아서 잠자코 내 옆에 있었다고 했다. 태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 밀려왔다. 착한 녀석이란 건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감히 생각도 못했다. 내가 지난밤의 과정이 궁금해 물었지만 태익이가 한 치의 왜곡도, 누락도 없이 꼬박꼬박 말하는 통에 태익이에게 부끄러운 감정을 넘어서 화가 날 정도였지만 어제 밤에는 분명 고마운 존재임이 틀림없다.
전봇대에 의지하기를 몇 십분. 나는 취기가 약간 풀렸는지 제 발로 걷고자 하는 용기가 생겼던 모양이다. 태익은 얼른 어깨동무를 하고 날 잡아끌었다. 세발 리어카처럼 아슬아슬 하기만한 우리 둘은 가장 가까운 모텔까지 갔단다. 거기서 태익은 내 지갑에서 카드도 돈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정말 오랜만에 ‘깊은 탄식’을 했다고 통화 중에 농담처럼 말했다. 침대로 내던지고 도망가듯 사라진 태익을 뒤로한 채 나는 세상모르고 깊은 수면에 빠졌다. 그 때만큼은 난 아무 걱정도 없는 말끔한 정신으로 잠을 잤다. 인위적인 문제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는, 오로지 생명 유지를 위한 본능적인 잠. 나는 큰 우리의 작은 짐승처럼 자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