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 이렇게 세 글자 또박또박 써놓고 보니 옛날영화 같은 내 지난 사랑도 생강나무처럼 맵쌀한 내력을 끌어안고 사는구나 싶어 잠시잠깐 뜻 모를 한숨이 피어오릅니다. 그토록 절절했던 사랑도 수줍던 그 사람 얼굴도 마침내 옛것이 되고 아득한 이름만이 남았을 뿐, 이젠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상냥했던 웃음, 가지런한 치아, 바람에 넘실대던 긴 머리에 대한 기억은 그저 낡은 기념사진과도 같아 어렴풋한 각인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어떤 사랑이든 옛사랑의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그건 서툴었던 감정이 만들어 낸 상심이기도 하고 절박한 만큼 단호했던 인연의 함정 같은 것이기에, 생각하면 생각을 하면, 자꾸만 가슴이 매캐해집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물론 옛사랑이 그 사람이 무시로 생각나고 그리운 건 아닙니다. 도리어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 문득, 정말 어느 날 문득 가슴에 푸른 서리가 내리게 되면 찰나를 타고 틈입하는 애상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옛사랑은 허한 마음이 외롭다고 느낄 때,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처럼 울고 싶은 심사가 되어 심정의 적막강산을 경험할 때 간혹 찾아오는, 그러니까 떠나야 했던 것과 잃어버린 것에 대한 뒤늦은 마음의 길항이 아닐까 합니다. 때로는 심금을 건드리며 눈물과 콧물을 유발하는 최루성 인풀루엔자가 되기도 하니 말입니다. 생의 어느 한 정점을 이루었던 그 때 그 시절의 자신과 그 사람에 대한 잠시잠깐의 회고, 그건 일종의 아쉬움과 연민과 회한이 어우러진 모호하고 복잡한 감정입니다. 세상 어딘가에 점 하나처럼 박혀 살고 있을 옛사랑을 회억하는 일은 그래서 하나의 쓸쓸함이자 사소한 안부의 마음으로 갈음하는 미답의 그리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랑은 옛일 그대로 그 곳에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찾아나서는 순간 세월은 옛사랑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기도 하니까요. 손이 닿지 않는 저기 저만치의 아득한 거리, 꼭 그만큼의 심연에 놓아두는 일은 내내 그랬듯이 견딜만한 통점입니다. 이제 과연 옛사랑을 추억이라 말해도 될까요. 어느새 세상은, 다시 또 가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