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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바보들의 세상(28)

     날짜 : 2009년 10월 21일 (수) 9:02:54 오후     조회 : 2691      

반복이란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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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니 채신은 AFKN을 보고 있었다. 영국방송이 나왔다면 채신은 분명 영국방송을 보았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집 TV는 영국방송이 나오지 않는다. 어쨌든 채신은 우리나라 TV는 시시하다고 안 본다. 사실 채신의 말이 어느 정도 맞긴 하다. 솔직히 우리나라 방송프로그램은 볼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채신이 보고 있는 또한 볼 프로가 별로 없는 것은 우리나라랑 사정이 다를 게 없다.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거 아니다. 미국의 어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은 TV 시청이라고 했다. AFKN을 보던 채신은 시트콤이 끝나자 비디오를 틀었다. 어디서 빌려왔는지 모르는 테이프로 여전히 자막은 없었다. 미국건지 영국건지 알 수 없지만 영국것임을 확신한다. 채신은 이 세상에서 영국 영화가 가장 수준 높다고 생각하는 희귀종이다. 나는 프랑스 영화가 수준 높은 예술영화라고 하는 사람들은 더러 봤으나 영국 영화를 보고 그런 얘기 하는 사람은 내 아내인 채신밖에 보지 못했다. 채신은 재미있다는 듯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나는 영화속의 등장인물이 뭔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게 다 이해가 돼?”

“물론. 난 영어를 잘 하잖아.”

채신은 정말 영어를 잘 한다. 영화속의 대사들까지 이해를 하다니 말이다. 사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영화대사다. AFKN을 알아듣는 사람이라도 영화대사를 다 알아듣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대학 다닐 때 영어공부는 조금 해 봐서 안다. 나는 감탄하는 눈으로 채신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감탄을 하며 채신을 본 것은 채신의 영어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건 바로 채신은 진정한 바보라는 생각이 또 스쳤기 때문이다. 채신은 이번에 나하고 신혼여행으로 영국으로 떠날 때 까지는 외국에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 인간이다. 채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채신이 영어를 참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린 같이 저녁을 먹고 나와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외국인이 걸어와서는 우리한테 길을 물었다. 나는 무슨 소린지 몰라 당황했는데 채신은 그 외국인에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외국인이 Thank you란 말을 하고 떠나자 나는 채신한테 어디서 배웠길래 영어를 그렇게 잘 하냐고 어느 나라에 갔다 왔냐고 물었다. 채신은 자신은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라 혼자 공부했고 외국에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채신이 일하고 있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외국 선생들도 채신이 한 번도 외국에 갖다 오지 않았는데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것을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래서 나는 채신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채신이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현준이 덕택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니 얘기는 그 아가씨는 외국에 갔다 왔으면서 외국에 갔다 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한다는 거지?”

“그래.”

“하지만 외국에 갔다 오지 않고도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어느 정도까지지. 완전 미국인인 것처럼 말했다고.”

“좋았어. 특별히 할 일이 없었는데 잘 됐네.”

“뭐가?‘

“조사할 게 생겼잖아? 내가 그 아가씨가 외국에 나갔다 온 적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봐 줄게. 얼마 줄래?”

“뭐? 내가 너한테 돈을 왜 줘?”

“좋아. 그럼 무보수로 일해주지. 넌 나의 둘도 없는 친구니까.”

“미친놈.”

그 때 나는 현준이가 정말 그런 조사를 하고 다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인간은 다음날부터 그 조사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는 며칠 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니가 말한 그 아가씨 말이야? 이름이 채신이라고 했지. 그 아가씨는 정말 외국에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어. 여러 각도에서 조사를 해 봤는데 100% 사실이야.”

나는 그 때 그런 것 조사하고 다닌 그 인간이 한심하다는 생각보다는 그의 발표결과에 놀랐다. 어떻게 외국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는데 본토인처럼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채신이를 만났을 때 물어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 하는 거야? 외국에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다면서.”

“중 1때 우연히 영국 영화를 한 편 보게 됐어. 근데 그 영화가 너무 재미있더라고. 그래서 그 영화를 보고 또 봤지 한 100번 정도는 봤을 거야. 그렇게 보다 보니 다음 장면이 무엇인지 저 사람이 다음에 할 말이 무엇인지 미리 다 알게 되 버리더라고.”

“그런데도 그 영화를 보고 또 보고 그런 거야?”

“응”

“뭣 때문에?”

“뭣 때문이라니? 재미있으니까 봤지.”

나는 그 때 채신이 진정 바보라는 것을 깨달았고 외국에 한 번도 나가지 않고 영어를 잘 하는 인간은 채신같은 바보밖에 없을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다음 내용을 다 아는 영화를 뭐가 재밌다고 또 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내용을 다 아는 영화치고 재미있는 영화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한 장면 한 장면 그리고 배우들의 대사까지 다 꿰고 있는 그런 영화를 재미있다고 또 보다니? 채신은 정말 바보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사실 나처럼 별 볼일 없는 삶도 그런대로 재미있는 것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뭐든지 모르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지 아는 것은 하나도 재미가 없다. 나는 신을 안 믿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이 세상을 위해 한 일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앞날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간에 그 때 나는 내가 진정한 바보가 아니라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반복이란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사람들은 공부의 기본은 반복이라고 한다. 정말 바보같은 사람들만 사는 바보같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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