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거들떠보도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뼈 두 개 발목뼈 두 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넣어
꽃씨 하나 묻어들고 가겠습니다
(반칠환·시인, 1964-)
+ 죽음 속에 눕다
꽃동네에서 관체험을 했다
촛불 아래서 유서를 쓴 후 관이 놓인 방으로 들어갔다
관 뚜껑에 경첩을 단 하얀 오동나무관이
비로드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관 뚜껑을 열고 관에 들어가 바로 누웠다
내가 쓴 유서를 가슴에 얹고
몸 얼굴 전체에 검은 천을 휘덮자 뚜껑을 덮었다
고무 못을 네 귀퉁이에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못 박는 소리가 저승사자의 발자국 소리로 들렸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더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의식만 또렷이 되살아났다
빈손으로 왔다가 가는 생이라더니
살아온 삶의 흔적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없는
텅 빈 어두운 공간
관 속에 나 혼자 맨몸으로 누워 있었다
살아 꿈틀거리던 모든 욕망들이
죽음 앞에서 맨몸 하나로만 남아 있었다
산다는 게 몇 근의 허망한 살덩어리일 뿐이었다
순간, 관 뚜껑이 열리고 나의 영정이 놓인 방으로 갔다
검은 띠를 두른 영정 앞에 향불을 피우며
죽은 내가 나의 유서를 읽어보았다
나를 얽어맨 삶의 끄나풀들
내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한 장의 가벼운 종잇장이었다
한줌의 재가 되어 연기로 날아오르는 유서를 보며
죽음이란 나를 버리는 것이었다
나를 버리고 가장 나다운 나만이 살아남는 것이었다
(송태옥·시인, 1962-)
+ 서 있으면서 가는 나무 - 山詩·54
땅에 누운 것들은 모두 싱싱해진다
썩을수록 무無 가까이서 맑아진다
잎 떨어진 가지 사이로 보니
구름이 산을 밟았구나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구나
구름 밟은 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나무
저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누구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어디로 가고 있는 나무다
서 있으면서 가고 있는 산
풀잎도 여기 앉아서 구름 냄새가 난다
내가 죽으면
어떤 냄새가 날까
나뭇잎 떨어져 햇살에
몸 말리는 냄새?
(이성선·시인, 1941-2001)
+ 하늘을 보며
병아리 눈물 같은 술 방울에
가슴이 젖는다.
몇 년 죽었다
다시 살 순 없을까
아서라.
삶에는 마침표는 있어도
쉼표는 없으니...
내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해님과 달님
나도 히히
웃다가
떠날까 봐요
(구광렬·시인, 대구 출생)
+ 귤꽃 앞에서
어떤 시인은 죽음을 일러
모차르트를 더 이상 못 듣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이 아침 나도
한 그루 귤나무 앞에서 아부한다
죽음은
나로부터 네 향기를 앗아간 것이라고…
(임보·시인, 1940-)
+ 죽음의 행복
흰나비야
그렇게도 후박꽃 향기가 좋더냐
향기 속에 푹 파묻혀
생명까지 묻어 버린
너는 행복하여라
달콤한 향기를 영원히 간직하고
누가 생의 종말을
꽃 속에서
달콤한 향기 속에서
생의 날개를 접을 수 있으리
너는 죽었어도 행복하여라
인생도 꽃의 향기에 취해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
(이승구·시인)
+ 영안실에서
저기 내가 누워있다.
한 발 한 발 뛰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외길
모진 바람이 불면
또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 외길
저기 내가 혼자 누워있다.
나만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안실에서 바라본 풍경은
극장 입구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긴 행렬처럼
예약해 놓은 사람들로 줄을 서고 있다.
(엄원용·시인, 1944-)
+ 문(門)
이 세상에 온 이들은 언젠가
저 세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 세상으로 들어올 때는
누구나 육신의 문을 통해 왔지만
저 세상으로 떠나갈 때는
한결같지 않다
흙의 문을 비집고 더디 지하로 빠져나가기도 하고
불의 문을 열고 황급히 천공으로 날아가기도 한다
바람의 문을 통하는 이도 있고,
물의 문을 이용하는 이도 있다
티베트의 어느 고원에서는 새의 몸에 실려 떠가기도 하고
남미의 어느 초원에서는 수목의 뿌리를 타고 스며들기도 한다
토장(土葬) 화장(火葬)
풍장(風葬) 수장(水葬)
조장(鳥葬) 임장(林葬)
밀고 나가는 문들은 다 다르지만
그들이 장차 돌아가는 곳은 같다
우주의 바다
허공
별들을 빛나게 하는
거대한 어둠의 밭이 된다.
(임보·시인, 1940-)
+ 빈자리가 가렵다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큰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 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사는 것인데
생의 종점에 다다를수록 바닥 더 깊어지는 욕망,
죽음도 이제 진부한 일상일 뿐이어서
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인 표정을 짓고 우리
품앗이하듯 부의봉투를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죽음의 세포가 맹렬히 증식하는 밤
빈자리가 가려워 전전반측 잠 못 이룬다
(이재무·시인, 1958-)
+ 재 한 줌
어제, 그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한 줌 재뿐이네.
(조오현·승려 시인, 1942-)
+ 무덤의 크기
뉴스에 또 한 거인이 돌아갔다
어둠이 그의 잠을 둘러쌓고 있다
지구를 수십 바퀴 돌았을 수많은 업적
그리 긴 세월을 걸어와서 누웠어도
그의 누운 기장은 겨우 170센티미터에 불과했다
저 왜소한 어느 곳에
그리도 거대한 우주를 품었었을까
희미하게 회상 하나 어둠에서 피어나와 압도한다
손을 펼치면
또 다른 그의 영채(映彩)가 거대한 산이 되어 왔다
사람들은 산을 어루만지며
무릎으로 기어서
그의 무영(無影)으로 기어들었다
애도의 발길이 차츰 뜸해지며 뉴스가 지나감은
짧은 그의 시간도 끝나가고 있음이다
적막한 고요가 어둠으로 흐르고
영정에 마지막 향이 짙게 피워 오를 때
영원한 무덤을 향한
그의 혼이 떠나는 것을 본다
(이영균·시인, 1954-)
* 2011년 1월 24일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을 추모하면서
+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그 하루를 정원에서 보내리라.
허리를 굽혀 흙을 파고
거기에 작은 풀꽃들을 심으리라.
내가 떠나간 뒤에도
그것들이 나보다 더 오래 살아 있도록.
아마도 나는 내가 심은 나무에게 기대리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새와 곤충들 또한 나처럼 그 나무에
기대는 것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어쩌면 나처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지막으로 흙 위로 난 길을 걸으리라.
걸으면서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진실했던 때를 기억하리라.
아마도 그것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되리라.
그 어느 날보다 후회하지 않는.
(앤 하긴슨 스파이서)
+ 오늘은 죽기 좋은 날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을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 속에서 녹아들고
모든 잡념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마침내 순환을 마친 저 들판
웃음이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앉은 자식들
그렇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겠는가
라고,
노래하는 타오스족 인디언처럼
내 영혼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어느 날
찰칵
이 세상 마지막 풍경을 담은 눈동자
비문인 양 석양에 쏘아두고
나 기꺼이 죽기로 한다
죽어서 영원히 행복하기로 한다
오늘은 죽기 좋은날
정녕 죽어서 복된 날
죽자!
열망이여, 목숨이여!
하지만
최후의 찰나 내 그리움은
컹컹
팔려가던 개처럼 목줄을 끊고
필사적으로 죽음에서 도망쳐온다
오늘은 죽기 좋은날
그래서
살기엔 더욱 좋은날
살자!
열망이여, 빛나는 목숨이여!
오늘은 살기 좋은 날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을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 속에서 녹아들고
모든 잡념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살기 좋은 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다시 순환을 시작하는 저 들판
웃음이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앉은 아내와 자식들
그렇다, 삶이 축복이 아니면 무엇이 그것이겠는가.
(김인·시인,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