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숲에
날개를 다쳐 돌아오는 새 있다
무리에서 저만치 처져서
어느 이역의 하늘을 떠돌다 오는지
꺼져가는 석양이 아쉬워
별 가까운 먼 하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지
절름거리는 날갯짓으로
별빛 한 가닥 물고 오는 새 있다
밤새 새는
부서진 깃을 다듬어
새로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
숲은
쓰린 달빛으로 수런거리던 것을…
숲에 가보라 새벽
새는 그새
해뜨는 쪽으로 높이 날아오르고
높이 나는 새의 날개깃엔
언제나 핏빛이 돌아
아침해 저리 고운 것을
보라 새가 떠난 자리엔
상처받은 자만이 부를 줄 아는
곱디고운 노래가
숲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복효근·시인, 1962-)
+ 새였으면 좋겠어
새였으면 좋겠어. 지금의 내가 아니라
전생의 내가 아니라, 길짐승이 아니라
옥빛 하늘 아득히 날개를 퍼덕이는,
마음가는 데로 날아오르고 내리는
새였으면 좋겠어. 때가 되면 잎을 내밀고
꽃을 터뜨리지만, 제자리에만 서 있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 아니라, 걸을 수는 있지만
날지 못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몸에도
마음에도 퍼덕이는 날개를 달고 있는
새였으면 좋겠어. 그런 한 마리 새가 되어
이쪽도 없고 저쪽도 없는, 동도 서도 없이
저쪽이 이쪽이 되고, 북쪽이 남쪽이 되는
그런 세상을 한없이 드나들고 오르내리는
나는 하염없이 꿈꾸는 풀, 아니면 나무
아니면, 길짐승이나 전생의 나, 아니면
지금의 나도 아니라, 새였으면 좋겠어.
언제까지나 아득한 허공에 날개를 퍼덕이는,
(이태수·시인, 1947-)
+ 새와 나무
아주 가녀린 새 하나
아주 가녀린 나뭇가지 위에
미동 없이 앉아 있다
얼음처럼 깨질 듯한 냉기를
뼈 속까지 견디며
서로가 측은하여 함께 있자 했는가
모처럼
세상이 진실로 가득해진
그 중심에
이들의 착한 화목이
으스름한 가락지를 두르고 있다
(김남조·시인, 1927-)
+ 딱따구리의 부리
먹이를 집을 땐
눈부신 포크
적을 방어할 땐
예리한 창
집을 지을 땐
민첩한 끌
그리고
속삭이며 애무할 땐
부드러운
입이며 손
(임보·시인, 1940-)
+ 핸드폰
핸드폰 한 대씩은 새들도 갖고 있지.
지붕 위 새 한 마리 어딘가로 전화 걸면
그 소식 반갑게 받은 짝궁 하나 날아오고.
어쩌면 새가 먼저 핸드폰을 썼을 거야.
전화선도 필요 없고 수화기도 필요 없고
저 하늘 푸른 숫자판 부리 하나면 간단한 걸.
삐룩삐룩 여보세요 또로로롱 사랑해요.
우리 동네 아침 시간 혼선되는 새소리들
그래도 끼리끼리는 척척 듣고 통화하네.
(한혜영·아동문학가, 1953-)
+ 텃새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새는 언제나 나뭇가지에 내려와 앉는다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하늘 바깥에서 노숙하는 텃새
저물녘 별들은 등불을 내거는데
세상을 등짐 지고 앉아 깃털을 터는
텃새 한 마리
눈 날리는 내 꿈길 위로
새 한 마리
기우뚱 날아간다
(김종해·시인, 1941-)
+ 딱새
남의 빈집에 사는 나처럼
처마 밑
빈 제비집에 둥지를 튼 딱새
지붕에 앉고
대문에 앉고
빨랫줄에 앉고
벌레 고쳐 물며
두리번두리번
그러다 다시 숨고
새끼들 철없이 노른 입 벌리고
가슴이 붉은 수놈보다
더 조심 떠는 암놈
안쓰러워 집 나서며
사람들 마실 못 오게
대문 닫다
당신 생각
(함민복·시인, 1962-)
+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친구야 네가 너무 바빠 하늘을 볼 수 없을 때
나는 잠시 네 가슴에 내려앉아 하늘 냄새를
파닥이는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사는 일의 무게로 네가 기쁨을 잃었을 때
나는 잠시 너의 창가에 앉아 노랫소리로
훼방을 놓는 고운 새가 되고 싶다.
모든 이를 다 불러 놓을 넓은 집은 내게 없어져도
문득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다시 짓는 나의 집은
부셔져도 행복할 것 같은 자유의 빈집이다.
(이해인·수녀, 1945-)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 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들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 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면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하느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 있다.
(정호승·시인, 1950-)
+ 아름다운 녹
고목이 쓰러진 뒤에
보았다, 까치집 속에
옷걸이가 박혀 있었다.
빨래집게 같은 까치의 부리가
바람을 가르며 끌어올렸으리라
그 어떤 옷걸이가 새와 함께
하늘을 날아봤겠는가, 어미새 저도
새끼들의 외투나 털목도리를 걸어놓고 싶었을까
까치 알의 두근거림과 새끼 까치들의
배고픔을 받들어 모셨을 옷걸이,
까치 똥을 그을음처럼 여미며
구들장으로 살아가고 싶었을까
아니면, 둥우리 속 마른 나뭇가지를
닮아보고 싶었을까
한창 녹이 슬고 있었다
혹시, 철사 옷걸이는
털실을 꿈꾸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정록·교사시인, 1964-)
+ 새
산불이 났다
불의 바다 속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새는 나무 위를 맴돌며
애타게 울부짖었다
그곳에는 새의 둥지가 있었다
화염이 나무를 타고 오르자
새의 안타까운 날갯짓은 속도를 더해 갔다
마치 그 불을 끄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둥지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새는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감싸 안았다
갓 부화한 둥지 속의 새끼들을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덩이가 되었다
폼페이에는 병아리들을 날개 속에 감싸 안은 닭의 화석이 있다
(유자효·시인, 1947-)
+ 새의 부족
새들의 노래로 지도를 만드는 부족이 있었다지
새들의 방언에 따라 국경선과 도계를 긋고 살았다는
사라진 부족의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더라
아마도 새들은 모든 뻣뻣한 경계선을 수시로 넘나들었을 거야
수백 킬로쯤 끌고 온 국경선을 강물에 풍덩 빠뜨리고
산정에서 끝난 도계를
노을 지는 지평선까지 끌고 가 잇기도 했을 테지
그런 선들이 악보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끝없이 출렁이는, 새로 그려지는
풍경들은 아마 음표를 닮아 있었겠지
악보를 읽는 일이 지도를 보는 일과 같았을 때
그들의 귓속으론 별자리가 흘러들었겠지
어느 부족의 방울새는 도라지멍울이나 개암열매가 터지듯이 울고
어느 부족의 방울새는 나뭇잎에 빗방울 부딪는 소리를 내며 울다가
수면 위로 막 뛰어오른 물고기 바늘이
햇빛과 부딪칠 때의 순간처럼 반짝였겠지
노래의 장단과 고저를 따라 해발이 시작되고
강의 시원과 하구를 측량하던 그때
측량할 수 없음을 측량하던 그때
저 부신 부리 끝 좀 봐, 나침반처럼
사라진 지도의 한쪽을 콕 찍으며 날아가는
(손택수·시인, 1970-)
+ 군무
우포늪에서 무리지어 내려앉는 새떼를 본 적이 있다
분홍빛 발갈퀴를 앞으로 뻗으며 물 위에 내리는
그들의 경쾌한 착지를 물방울들이 박수를 튀기며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을 물든 하늘 한쪽에 점묘를 찍으며 고니떼가
함께 날아오르자 늪 위를 지나가던 바람과
낮은 하늘도 따라 올라가 몇 개의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기쁜 숨을 내쉬었다
먹고 사는 일이 멀리서 보는 것과 달라서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눈은 맹금류처럼 핏발 서 있지 않았다
솔개나 올빼미가 뜰 때는 주변의 공기도 팽팽하게
긴장을 하고 하늘도 일순 흐름을 멈추며
피 묻은 부리와 살 깊숙이 파고들어간
날카로운 발톱을 주시하는데
물가의 새들은 맹금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만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고 어떻게 함께 날개를 움직여야
대륙과 큰 바다 너머 새로운 물가를 찾아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매같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조류들도 있지만 모든 새가 그들의 독무를
따라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서넛이 팔을 끼고 손에 지갑을 들고 사무실을 나서거나
일곱씩 열씩 모여 떠들며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몰려가는
점심시간의 마포나 강 건너 여의도 또는 구로동 골목에서
물새들을 본다
간혹 물가 빈터에 세운 운동장에서
축구경기를 보며 함께 소리 지르고
몇 해에 한 번은 어두운 하늘에 촛불을 밝히고
몇 십만 마리씩 무리지어 나는 새떼들의 흐르는 춤을
볼 때도 있다 새들이 추는 춤은
군무가 제일 아름답다
독수리가 되어야만 살아남는 건 아니다
가창오리나 쇠기러기들도 아름답게 살아간다
그들도 자연의 적자가 되어 얼마든지 씩씩하게 살아간다
(도종환·시인, 1954-)
+ 고독한 새
낡은 교회의 종탑 위에 고독한 새 한 마리
해질 때까지 넓은 광야를 향해 끝없이 노래하고 있나니
그 노래 소리 온 마을에 즐겁게 울려 퍼지도다.
아름다운 봄은 대기를 밝게 하고
대지를 충족시키니
이를 찬미하는 이의 마음 흐뭇하게 하노라.
들에선 양떼와 소들의 지껄이는 소리 들리고
하늘엔 만족스런 듯이 새들이 자유를 구가하면서
하늘을 누비며, 새들에게 가장 좋은 계절을 이리
즐거워하고 있노라.
생각에 가득 찬 듯한 한 마리 새,
너는 이 광경을 모두 보면서도,
친구도 찾지 않고, 날 생각도 않고,
즐거움을 마다하는구나.
다만 노래 부르는 것으로
가장 아름다운 계절과
너의 젊은 시절을 보내는구나.
아 너의 그 외로운 모습,
어찌 나의 고독함과 그리 닮았느뇨!
젊은 시절의 흥겨운 동반자인 즐거움과 웃음도,
젊은이의 형제인 사랑도,
늙은 후의 후회도 나에겐
또 나의 젊은 시절을,
나 자신을 그 누가 이해하리오?
그렇게까지 된다면
아 나는 후회 속에 날을 보낼 것이며,
위로의 희망도 없이
지난날의 추억 속에서만
삶을 지탱해 나갈 것이로다.
(레오파르디·러시아, 1798-1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