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관한 시 모음> 오세영의 '나무처럼' 외 + 나무처럼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듯 (오세영·시인, 1942-) + 나무의 경지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 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 있는 그 한 가지로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정병근·시인, 1962-) + 나무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이다.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키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 우리가 저물녘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인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오지만,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김현승·시인, 1913-1975) + 묵상 삼백 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하루가 맑았다고 까치가 운다 잡것 (함민복·시인, 1962-) + 소식 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 그의 귀에 새벽 네 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브리스톨 콘 파인 수령 5,000년 겨우 1cm 자라는데 50-70년이 걸린다는 살아있는 나무 (임보·시인, 1940-) * 우리나라 역사를 불려서 반만년이라고 하니 이 나무의 수령이 앞선 셈이다. 오래 살겠다고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아, 뛰는 것이 결코 장수의 비결이 아니다. + 사물(事物)의 꿈·1 - 나무의 꿈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정현종·시인, 1939-) + 나무는 즐겁다 말없이 서 있다가 팔을 벌려 반긴다 뿌리는 독수리 발톱으로 땅을 가로챈다 잎새마다 거울 거울마다 태양(太陽) 태양이 산산조각 박살이 나도록 즐거운 바다여! 아아 머리채에 별이 깃든다! 꾀꼬리가 목청 속으로 가라앉는다 (송욱·영문학자 시인, 1925-1980) + 늙은 나무를 보다 두 팔로 안을 만큼 큰 나무도 털끝만 한 싹에서 자랐다는 노자 64장 守微*편의 구절을 읽다가 나는 문득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 감동은 대개 이렇게 오는 것이다 그래서 숲으로 들어가 평소 아침 산책길에 자주 만나던 늙은 느릅나무 영감님 앞으로 다가갔다 느릅은 푸른 머리채를 풀어서 바람에 빗질하고 있었다 고목의 어릴 적 일들을 물어보아도 묵묵부답 다람쥐가 혼자 열매를 까먹다가 제풀에 화들짝 놀라 달아난 그 자리에는 실낱처럼 파리한 싹이 하나 가느다란 목을 땅 위로 쏘옥 내밀고 있는 참이었다 (이동순·시인, 1950-) * 수미 : 노자가 쓴 <도덕경>의 한 부분. + 절필 - 한라산 구상나무에 바침 끝끝내 저 나무는 색(色)에 들지 않는다 바람에 끝을 벼린 바늘잎 세필로는 격문(檄文)은 쓰지 않겠다 붓을 꺾은 고사목 뼈를 깎는 뉘우침이 골각체(骨角體)를 만든다 산세가 험할수록 더 명징한 산울림이 오히려 필화(筆禍)가 되어 눈 퍼붓는 한라산 세상에 맞서려면 저렇게 간결하라 살점은 다 버리고 흰 뼈만 내리 꽂는 저 뻣센 반골의 획이 가슴팍에 박힌다 (이성목·시인, 1962-) + 나무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 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바람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류시화·시인, 1958-) +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황지우·시인, 1952-) + 커다란 나무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몸을 찢으며 갈라진다 찢어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갈라져 있었다는 듯 갈라진다 오래 전부터 갈라져 있던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너무 많이 가보아서 훤히 알고 있는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김기택·시인, 1957-) + 나무생각 나보다 오래 살아온 느티나무 앞에서는 무조건 무릎 꿇고 한 수 배우고 싶다 복숭아나무가 복사꽃을 흩뿌리며 물위에 點點이 우표를 붙이는 날은 나도 양면괘지에다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에 기를 쓰고 붙어 있는, 허리 뒤틀린 조선소나무를 보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고 싶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멀리 보내는 밤나무 아래에서는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나도 관계를 맺고 싶다 나 외로운 날은 外邊山 호랑가시나무 숲에 들어 호랑가시나무한테 내 등 좀 긁어 달라고, 엎드려 상처받고 싶다 (안도현·시인, 1961-) + 나무의 생애 비바람 드센 날이면 온몸 치떨면서도 나지막이 작은 신음소리뿐 생의 아픔과 시련이야 남몰래 제 몸 속에 나이테로 새기며 칠흑어둠 속이나 희뿌연 가로등 아래에서도 고요히 잠자는 나무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목숨의 중심처럼 지키면 그뿐 세상에 반듯한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서도 햇살과 바람과 이슬의 하늘 은총 철석같이 믿어 수많은 푸른 잎새들의 자식을 펑펑 낳는다 제 몸은 비쩍 마르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른 것들과 늦가을 찬바람에 생이별하면서도 새 생명의 봄을 기약한다 나무는 제가 한세월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