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은 봉우리에 둥둥 떠서
나무와 새와 벌레와 짐승들에게
비바람을 일러주고는
딴 봉우리에 갔다가도 다시 온다
샘은 돌 밑에서 솟아서
돌을 씻으며
졸졸 흐르다가도
돌 밑으로 도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서 졸졸 흐른다
이 이상의 말도 없고
이 이상의 사이도 없다
만물은 모두 이런 정에서 산다
(김광섭·시인, 1905-1977)
+ 우정
내 가슴속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글씨 하나 있다
과수원을 하는 경숙이 집에 놀러갔다가
아기 주먹만한 크기의 배의 가슴에다
머리핀으로 가늘고 조그맣게 쓴 글씨
맑은 햇살에
둥글게 둥글게 배가 커질 때마다
커다랗게 자란 글씨
우정
(정호승·시인, 1950-)
+ 우정
등덩굴 트레이스 밑에 있는 세사발
손을 세사 속에 넣으면 물기가 있어 차가웠다.
왼손이 들어있는 세사위를 바른 손바닥으로
두들기다가 왼손을 가만히 빼내면
두꺼비집이 모래 속에 작은 토굴같이 파진다.
손에 묻은 모래가 내 눈으로 들어갔다.
영이는 제 입을 내 눈에 갖다대고
불어주느라고 애를 썼다.
한참 그러다가 제 손가락에 묻었던 모래가
내 눈으로 더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영이도 울었다. 둘이서 울었다.
어느 날 나는 영이 보고
배가 고프면 골치가 아파진다고 그랬다.
"그래 그래" 하고 영이는 반가워하였다.
그때같이 영이가 좋은 때는 없었다.
(피천득·수필가, 1910-2007)
+ 철길
친구야, 생각해보게나.
철길 말일세.
두 개의 선이 나란히 가고 있지
가끔씩 받침대를 두고 말일세.
다정한 연인들 같다고나 할까?
수많은 돌들은 그들이 남긴 이야기고 말일세.
그 철길 위로 열심히 달리는 기차를
생각해보게나
두 선로는 만날 수 없네.
그러나 가는 길은 똑같지.
어느 쪽도 기울어져서는 안되지.
거리 간격이 언제나 똑같지 않았나.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는 것을 보게나.
친구야!
우리의 우정은 철로일세.
물론 자네가 열차가 되고 싶다면
할 수 없네. 그러나 열차는 한 번 지나가지만
철길은 언제나 남는 것이 아닌가?
열차가 떠나면 언제나 아쉬움만 남지.
친구야, 우리의 길을 가세.
철길이 놓이는 곳에는 길이 열리지 않나.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우정이란
어쩌면 사랑보다 더 깊은 것
그러나 결코 사랑은 아닌 것
분명 서로가 좋아하면서도
사랑할 수는 없는 것
사랑한다 말하면
깨져 버리는 것
그러나 분명 사랑보다 더 친밀한 것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
사랑하는 이에겐 못한 말도 할 수 있는 것
언제나 진실해야 하고
서로가 평등한 것
서로가 믿어야 하고
아주 작은 것도 서로 나누는 것
그러므로 우정이란 마음을
서로가 나누어야 하는 것
(최복현·시인, 1960-)
+ 우정은 가장 위대한 사랑
우정은 가장 위대한 사랑
우정은 우리의 슬픔을 가라앉히고
우리의 분노를 식혀주고
우리의 억압을 풀어주고
우리의 재난을 구해주고
우리의 생각을 의논해주고
우리의 명상을 일깨워 준다.
친구가 그대보다도 더 명예롭게 되고
더 명성을 얻게 되고
더 재능 있고 학식이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진심으로 노력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참된 우정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훌륭해진다.
우리의 우정이 깊어갈수록
신은 더욱 우리를 사랑하신다.
당신은 우정으로써
가장 위대한 사랑과 가장 위대한 가치와
가장 기탄 없는 대화와
가장 참된 진심을 모두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용감한 남녀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마음의 결속을 나타낼 수 있다.
(제임스)
+ 우정
우정은 편안함이다.
생각을 가늠하거나 말을 판단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안전함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이다.
있는 그대로를 전부 드러내 보이며
농담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
충실하고 다정한 손을 내밀며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지켜주고
안도의 숨으로 나머지 것들을 날려보낸다.
(앤드루 코스텔로)
+ 우정일기
1
내 마음속엔 아름다운 굴뚝이 하나 있지.
너를 향한 그리움이 하얀 연기로 피어오르다
노래가 되는 너의 집이기도 한 나의 집.
이 하얀 집으로 너는 오늘도 들어오렴,
친구야.
2
전에는 크게, 굵게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한꺼번에 많은 것을 이야기하더니
지금은 작게, 가늘게 내리는 이슬비처럼
조용히 내게 오는 너.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너는
쉬임없이 나를 적셔준다.
3
소금을 안은 바다처럼
내 안엔 늘 짜디짠 그리움이 가득하단다.
친구야.
미역처럼 싱싱한 기쁨들이
너를 위해 자라고 있단다.
파도에 씻긴 조약돌을 닮은
나의 하얀 기도가 빛나고 있단다.
4
네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구나.
네 대신 아파줄 수 없어 안타까운 내 마음이
나의 몸까지도 아프게 하는 거
너는 알고 있니?
어서 일어나 네 밝은 얼굴을 다시 보여주렴.
내게 기쁨을 주는 너의
새 같은 목소리도 들려주렴.
5
내가 너를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너도 보고 싶니,
내가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처럼
너도 좋아하니,
나를 알면서도 언제나 다시 묻는 말
우리가 수없이 주고받는
어리지만 따뜻한 말
어리석지만 정다운 말
6
약속도 안 했는데 똑같은 날 편지를 썼고,
똑같은 시간에 전화를 맞걸어서
통화가 안되던 일, 생각나니
서로를 자꾸 생각하다보면
마음도 쌍둥이가 되나보지
7
'내 마음에 있는 말을 네가 다 훔쳐가서
나는 편지에도 더 이상 쓸 말이 없다'며
너는 종종 아름다운 불평을 했지
오랜만에 네게 편지를 쓰려고
고운 편지지를 꺼내놓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무슨 말을 쓸거니
어느새 먼저 와서 활짝 웃는 너의 얼굴
몰래 너를 기쁘게 해주려던 내 마음이
너무 빨리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나는 더 이상
편지를 쓸 수가 없구나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한 그루의 우정 나무를 위해
우리가 한 그루 우정의 나무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선
한결같은 마음의 성실성과 참을성, 사랑의 노력이 필요하다.
지나친 고집과 독선, 교만과 이기심은 좋은 벗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정성스럽고 진지한 자세로 깨어 있어야 한다.
나와는 다른 친구의 생각을 불평하기보다는 배워야 할 점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기쁨과 슬픔을 늘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지니자.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늘 흔연히 응답할 수 있는 민감함으로 달려가자.
가을 열매처럼 잘 익은 마음, 자신을 이겨내는 겸허함과 기도의 마음으로 우정의 나무를 가꾸자.
(이해인·수녀 시인,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