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괜찮다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다
어젯밤 불던 바람소리도
바람을 긋고 간 빗소리도 괜찮다
보통 이상인 감정도
보통에 미달한 기분도 괜찮다
자고 일어나면 정말 괜찮다
웃어도 괜찮고 울어도 괜찮다
웃지 않아도 괜찮고 울지 않아도 괜찮다
유리창에 몸을 밀어 넣은 빗방울이
벗은 소리만으로 내게 오던 그 시간
반쯤 비운 컵라면을 밀어놓고
빗소리와 울컥 눈인사를 나누어도
괜찮다
너무 괜찮다
(박세현·시인, 1953-)
+ 신호등 앞에서
빨간불이 켜지자
넓은 길 좁은 길
쉬지 않고 돌아다니던
택시도 잠시 쉰다.
배추를 산더미처럼 실은
짐차도 잠시 쉰다.
'왕초보' 딱지 붙은
승용차도 잠시 쉰다.
빨간 불에 걸렸다고
짜증을 내는
아버지도 잠시 쉰다.
아무리 바빠도
잠시 쉰다.
(서정홍·농부 시인, 1958-)
+ 산토끼랑 달팽이랑
허둥지둥
언덕길 뛰어가던
산토끼가 글쎄
달팽이 보고 혀를 찼대.
너처럼 느릿느릿 가다간
언덕 너머 산비탈 뒤덮은
진달래꽃 잔치 못 보겠다.
달팽이도 글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대!
너처럼 빨리빨리 가다간
제비꽃 깽깽이풀 얼레지 족두리풀 매미꽃 봄까치꽃 애기풀 들바람꽃……
언덕길 따라 줄줄이 핀
풀꽃 잔치 하나도 못 보겠다.
(오은영·아동문학가, 1959-)
+ 가끔은
가끔은
전등을 끄고
밤하늘 별을 세어 보자.
가끔은
잊혀져 가는
얼굴도 떠올려 보자.
가끔은
일기장에
눈물 한 방울도 떨어뜨려 보자.
(이상문·아동문학가)
+ 영역
산기슭 집을 샀더니 산이 딸려 왔다
산에 오소리 발자국 나있고
족제비가 헤집고 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제비꽃 붓꽃 산나리 피고
멀리 천국에 사는 아기들이 소풍 와서는 똥을 싸고 갔는지
여기 저기 애기똥풀꽃 피고
떡갈나무는 까치부부가 독채를 들었다
풀섶에선 사마귀 둘이 덜컥덜컥 턱을 부딪히며 싸우는데
허 나도 질세라
집 있는 데서 오십 보 백 보는 더 걸어나가서
오줌이라도 누고 오고 그러는 것이다
(신현정·시인, 1948-)
+ 고요한 부잣집
그 집은 아침이 지천이요
서산 아래 어둠이 지천
솔바람이 지천이다
먼지와 검불이, 돌멩이와 그림자가 지천이다
길이며 마당가론 이른봄이 많아 부자고
하늘론 빛나며 오가는 것들로 부자다
나는 부자가 되길 원했으므로
그 부잣집에 홀로 산다
쓰고도 쓰고도 남고 남아 내리는
고요엔 어깨마저 시리다
(장석남·시인, 1965-)
+ 나는 평안하고 자유롭다
나는 누구를 해치거나 크게 미워한 적이 없으니
나를 원망할 자가 있을 리 없어 마음이 무겁지 않고
내 주머니 속은 늘 몇 푼의 용돈밖에 없으니
어느 도둑에게 털릴까 염려치 않아도 되고
나는 당이나 파들의 세력과는 담을 쌓고 지내니
모함과 저격의 대상이 아니어 편안하고
나는 별로 이름이 없어 세상이 나를 잘 알지 못하니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아 자유롭다
나는 무능한 家長, 게으른 市民
그러나 자유의 詩人이다.
(임보·시인, 1940-)
+ 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오규원·시인, 1941-2007)
+ 숨어사는 즐거움
가끔은 숨바꼭질처럼
내 삶을 숨겨두는 즐거움을 갖고 싶습니다
전화도 TV도 없고 신문도 오지 않는
새소리 물소리만 적막의 한 소식을 전해 주는
깊은 산골로 숨어 들어가
내 소란스런 흔적들을 모두 감추어 두겠습니다
돌이켜 보면 헛된 바람에 불리어 다녔음을,
여기저기 무지개를 좇아 헤매다녔음을,
더 이상 삶의 술래가 되어 헐떡이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는 적막 속으로 꼭꼭 숨어들어
홀로 된 즐거움 속에 웅크리고 있겠습니다
그리운 친구에게는 편지를 부치러
장날이면 가끔 읍내로 나가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갈 곳 없는 떠돌이처럼
갈대의 무리 속에 슬쩍 끼여들었다가
산새들 뒤를 허적허적 좇다가
해질녘까지 노닥거릴 생각입니다
내게 남은 시간들을
백지의 고요한 공간 속에 차곡차곡 쌓아 가겠습니다.
(조용우·시인)
+ 마찬가지
원망하지 말자
불평하지 말자
가죽 구두 신고 걷는 길
고무신 끌고는 못 갈 것인가
어차피 걷고 있는 목적지
동일한 것을
원망하지 말자
불평하지 말자
진수성찬 식탁이나
초라한 식탁이나
밥 한 그릇 비워 포만감 느끼는 건
마찬가지인 것을
원망하지 말자
불평하지 말자
넓은 공간에 누우나
좁은 공간에 누우나
내일 위해 꿈꾸긴
마찬가지인 것을
(손희락·평론가 시인, 대구 출생)
+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기를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식구들 얼굴을 마주보고도
살짝 웃어 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 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번 더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정용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