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나무가 앓고 있다
신음도 없이 표정도 없이
참나무의 허리
그의 몸, 저 깊은 곳으로부터
진물이 흐르고 있다
진물이 먹여 살리던 식구들을 기억한다
가장의 진액은 그러므로 울음이 아니다
식량이다
나무도 상처가 아물 때
가려움을 느낄까
가려워서 마구 잎을 피우고
가지 흔들어댈까
상처 없이 미끈한 나무가 떨군 열매 믿을 수가 없다
가려워서 어디든 몸을 문대고 비비고 싶은
생의 상처여,
낫지 말아라
몸 속의 너를 보낼 수 없다
상처는 기억이고 반성이고 부활이다
(이재무·시인, 1958-)
+ 밀물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정끝별·시인, 1964-)
+ 상처
나무줄기를 따라가 보면
상처 없는 나무가 없다
그렇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눈보라에 시달리지 않은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흔들린 만큼
시달린 만큼
높이와 깊이를 가지는 상처
상처를 믿고
맘놓고 새들이 집을 짓는다
상처를 믿고
꽃들이 밝게 마을을 이룬다
큰 상처일수록
큰 안식처가 된다
(박두순·시인, 1950-)
+ 상처의 힘
보잘것없는 들꽃일수록
빨리 꽃을 피운다
언제 짓밟힐지 몰라 잔뜩 긴장한 것들의
몸은 소름 돋아 시퍼렇다
감나무 가지에 어머니는 억지로 돌을 끼운다
멀쩡하던 가지에 구멍이 난다
수많은 상처를 향해
있는 힘껏 열매를 밀어올린다
(안명옥·시인, 경기도 화성 출생)
+ 아물지 않는 상처란 없다
상처를 건드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물지 않은 채 덮어버린 상처는
언젠가 폭발하고 말 지뢰와도 같다
상처는 본래 건드려서 아픈 것보다
돌보지 않아 절망이 되어버린 상처가 더 가혹한 법
상처를 건드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죽음보다 깊은 상처도
세월 앞에서 아물지 않는 상처란 없다
(이희숙·시인, 1963-)
+ 상처
쓰라리지만
소금물로 상처를 씻는 것은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눈물이 타서 굳은
숯덩이, 소금은
슬픔을 아는 까닭에
남의 상처를 아무릴 줄 안다.
큰 파도가 작은 파도를 안아 올리듯
작은 슬픔은
큰 아픔이 위로하는 것,
그러므로 비록 쓰라리지만
우리
상처는 비누로 씻지 말고
소금물로 씻자.
비누는
쾌락의 때를 벗기는 데
써야 한다.
(오세영·시인, 1942-)
+ 상처 - 씨감자
토실토실한 감자알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씨감자가 되려면
상처를 입어야만 해
상처도 혈서를 쓰듯
새끼손가락 하나 깨물어 피만 조금 내는
그러한 조그마한 상처가 아니라
적어도 두서너 번은
성한 몸뚱이
온전히 절단 당하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야만 해
그래야만 상처 입은 몸
미련 없이 푹 썩히어
새싹을 틔우고 새 줄기를 내리고
끝내는 새 감자알을 키워 나가는
감자밭 이랑에
비로소 묻힐 수 있는 거야
(정세훈·시인, 충남 홍성 출생)
+ 몸
살아갈수록
상처에 손이 간다
손톱이 자라는 동안
왜 손금이 가려운지
새벽녘에 들어보는
늙은 레코드처럼
내 몸은 지지직거리는
유한반복의 날들
어제를 견디어 온
저 벽면의
수직 빗물자국
길게 흘러내리는
새벽
살아갈수록
상처가 가렵다
낫지 않는 깨진 상처 위에
푸른 별이 돋는다
(김경호·시인, 경북 의성 출생)
+ 그리운 상처
당신의 상처를 더듬네,
사랑이 크는 만큼
슬픔이 커 오듯이
당신을 아는 만큼
더 크게
다가오는 당신의 아픔
그 상처,
내 마음에 들어와
내 비린 육신에 들어와
투명한 슬픔으로 자라나느니
나,
어느새 내게서 잊혀져 가고
저 혼자 자꾸 커가는
당신의 상처,
황홀한 사랑의 상처,
당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네
사랑이 커가면,
슬픔도 기쁨으로 자라나느니
(홍수희·시인)
+ 흉터에 대해
신혼 초였다
연탄보일러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몰라
온수 호수를 빠트렸다
펄펄 끓던 물이
허벅지로 쏟아졌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12시쯤 집에 온 남편 저녁준비를 하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누워 있을 때면 보이는 흉터
가끔 남편이 그 자리를 만지곤 한다
처음에는 손을 뿌리치며
당신 만난 훈장이야 했었는데
언제부턴가는
쓰윽 웃게 되었다
내 몸이지만 촉감도 다른
흉터도
살아가는 동안 변한다
기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배경이 달라지면
의미도 변한다
때로는 점점 빛날 수도 있다
(이성이·시인)
+ 상처가 더 꽃이다
어린 매화나무는 꽃 피느라 한창이고
4백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 섰다
둥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 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勳章)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符籍)으로 보이는가
백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도 맡아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
(유안진·시인, 1941-)
+ 상처를 위하여
박씨의 검지는 프레스가 먹어버린
반 토막 짜리다 그런데 이게
가끔 환하게 켜질 때가 있다
그가 끼던 목장갑을 끼면
내 손가락에서 그의 검지 반 토막이
환하게 켜지는 것이다
박씨는 장갑을 낄 때마다
그 반 토막의 검지가 가려워서
목장갑 손가락을 손가락에 맞게 접어 넣는다
그 접혀 들어간 손가락은 때가 묻지 않는다
환하게 켜지는 검지의 반 토막이 보고 싶어
나는 그가 끼던 목장갑을 끼곤 하는데
그러면 전신에 전류가 흐르듯 하는 것이다
상처가 켜 놓은 것이 박씨의 검지뿐이랴
과일들은 꽃이라는 상처가 켜 놓은 것이다
상처가 없는 사람의 얼굴은 꺼져 있다
상처는 영혼을 켜는 발전소다.
(최종천·용접공 시인, 1954-)